예비자 교리교안
이철희 신부
1. 창세기 12, 1-3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 너에게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내가 복을 내릴 것이며, 너를 저주하는 사람에게는 저주를 내리리라. 세상 사람들이 네 덕을 입을 것이다. ”
2. 떠남의 의미 - 나이 75세에.
무엇을 바라고 떠났을까? 여기에는 그 목적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순종하는 것밖에는.
우리는 무엇을 바라고 이 자리에 왔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를 여기에서 다 순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3. 지금 시대와는 다른(1850+1998=3848년, 약 4000년 전쯤, 우리의 단군시대에 해당?) 이 시대에는 부족사회요 씨족사회였다고 한다. 이때 한 부족의 구성원이 그 곳을 떠나 삶의 터전을 옮긴다는 것은 목숨을 거는 모험이었다. 그러나 아브람은 떠난다. 그는 무엇을 믿고 떠났을까? 오직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 하나뿐이었다. 이렇게 떠난 행위의 결과는 여러분들이 예비자 교리반을 통해서, 그리고 훗날 성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면 알게 될 것이다.
4. 말 한마디를 믿고 떠난 일의 결과가 엄청난 열매를 맺었는데, 이 자리에 함께 하는 여러분들의 떠남도 같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준비할 수 있도록 우리도 더 노력할 것이고, 예비자 교리를 담당하는 분들도 도움을 주실 것이다.
5. 여기에서 이야기되는 하느님의 축복선언과 저주선언을 먼저 기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삶의 결과로 우리가 알아듣는 결과일 뿐이다. 우리의 삶, 이 순간의 시작이 나로 인하여 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될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법에 따라 다른 것일 뿐이다.
첫날 첫 만남을 위하여
6. 선택된 날의 의미: 오늘은 교회가 정한 날 중에서 ‘성모영보(聖母領報) 대축일(大祝日)1)’입니다. 더불어 여러분들이 함께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중요한 의미를 두자면, 오늘보다는 이 예비자 교리의 마지막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세례 받는 날에 일치해야 더 의미 있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의 말을 전하는 천사의 말에 대하여 ‘몇 마디의 말이 오고 간 다음, 그렇게 되도록 이끌어 주신다면 고맙고 좋겠습니다’라는 순응의 결과를 통하여 이 세상에는 구원이 시작되었다고 가톨릭의 신앙인들은 받아들입니다. 물론 똑같은 ‘예수를 삶의 중심’으로 두고 있는 ‘개신교’는 강조점이 좀 달라서, 이 사실을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가톨릭과 같은 자세를 이단으로까지 치부합니다. 물론 개신교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을 안 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시작하는 이 날의 의미도, 오늘의 시작으로 인하여 얼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 여러분들의 삶의 모양을 바꾸어놓았다면, 오늘 그 출발점의 날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신앙을 바꾼다?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인다는 말의 의미
사람은 누구나 무엇인가를 믿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이 되었든, 미신이 되었든, 자신의 두 주먹이든 간에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믿고 의지하는 그것 때문에 사람의 생활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게 됩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바뀌는 것이죠. 형체가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또는 그 반대로, 유한한 것에서 무한한 것으로, 눈에 보이는 것에서 그렇지 않은 것으로, 그러나 가톨릭의 신앙을 한번 받아들인다면 죽기까지 충실을 다하라고 다짐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받아들이고 생활하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결코 혼자만의 신앙은 아닌데도, 가톨릭의 신앙인들은 매우 이기적이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삶과 죽음을 함께 보기 때문에 겁을 먹어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정 없다는 소리도 들리고, 성당이라는 모임에 누가 왔는지, 모임이 끝나고 누가 가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말도 합니다. 그것은 분명 바뀌어야 할 것인데도 아직은 그렇습니다.
종교를 한문으로는 ‘宗敎’라고 씁니다. 특별히 어려운 것은 아니지만,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가르침에 해당되는 것이 ‘만사의 줄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쓰고 듣는 말 중에 종가(집), 종손, 종마 등에도 같은 종(宗)자를 씁니다. 사람이 서 있게 하는 근본이 되는 것이니,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어쩌면 삶의 새로운 탄생, 이전 것에서부터 완전한 죽음 등을 의미하는 말이 되고 또한 그렇게 하려면 대단히 조심해야 합니다. 한옥의 대들보를 바꿀 수 있다는 전제하에 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얼마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한번쯤 생각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사람의 육체 세계에는 힘들다 어렵다 할지 몰라도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만은 아닙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믿음을 바꾸고 새것을 배운다는 의미 이상을 갖는 것이 바로 종교에 대한 것입니다.
8. 예비자 교리반의 과정 -- 초대받은 당신을 따라서.
오늘 짧은 이야기를 드린 다음에, 앞으로의 윤곽을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먼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성서 중심적인 면으로 살펴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어느 정도는 알아야 성서도 이해하고 우리 삶에 적용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는 신앙의 근간이 된 인물, 하느님으로서 인간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룰 것입니다. 더불어 삼위일체(三位一體)로서 성부이신 하느님, 성령이신 하느님의 부분도 다룰 것입니다 -- 믿을 교리 편
사람은 이 세상을 살고 지내면서 여러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사람끼리의 도움을 물론이고, 하느님의 도움을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이 부분을 가리켜, 가톨릭 교회의 교리에서는 성사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도 합니다. -- 성총(聖寵)을 얻는 방법 편
다음으로는 인간의 행동을 통하여 행할 삶의 지침을 이야기하는 지킬 계명(誡命)편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삶을 마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신앙이 이야기하는 것, 우리 삶의 최종목적에 대해서, 그리고 영원한 생명에 일치하기 위해서 거쳐할 마지막 과정인 죽음-정화와 조명의 기간-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9. 부탁의 사항
저도 노력하겠습니다만, 기왕에 시간을 내서 시작하신 일, 한 분도 낙오되는 분 없이 끝까지 함께 같은 길을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10. 지난 시간에 종교를 바꾼다는 말에 대한 것을 여러분들에게 말씀 드렸습니다. 오늘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겠습니다. 제가 많이 알아서 드리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새로운 형태의 삶을 소개하는 차원에서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피상적(皮相的) 관찰
11. 사람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存在)라고 생각한다. 남을 돕는 일로써 다른 사람에게 활기를 느끼게 하는 건설적인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든 말든 자기 중심적으로 살고 그 이념(理念)에 따라서 움직이기에 생명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하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리고 결코 혼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자기 중심적으로 일을 생각하고 처리하는 데에는 문제가 개입하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자신만 대우받기를 원하지, 내가 중요한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귀중하게 여길 줄 모르는 마음이 자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어디 그런가?
12.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결코 무엇을 많이 알아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저보다 인생의 경륜이 더 많고 뛰어나고, 사회에서 더 큰 역할을 하는 사람들도 이 자리에 함께 하실 것이다. 다 알 수는 없지만. 그러므로 제가 이야기 드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자리가 형성된 과정을 먼저 떠올려야만 그 의미가 규정될 수 있다.
13. 이 자리는 여러분이 시간을 내서 함께 하신 자리이고, 시간의 주도권이 다분히 제게 있으므로, 제가 생각한 대로 이끌어 갈 것입니다. 이 시간이 마련된 목적은 다름아니라,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알려주고, 여러분들을 거기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야기의 구성은 종교와 신앙 지향적일 수밖에 없음을 미리 알려둡니다.
14. 첫 번째 순서로 인간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너도나도 모두 다 인간이라 불립니다. 한자로는 人間이라 쓰는데, 사람을 설명하는 데에 사람인(人)을 쓰고 그 사이에 뭐가 있는지 또한 간(間)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사람이라고 하는 존재는 홀로 살 수 없고 공동체(≠무리)를 이루어야만 제대로 그 의미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한다면, 첫 머리에 말씀드린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가 조금은 축소되지 않을까 합니다.
15. 이러한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를 제기하고 신앙에서, 종교에서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오늘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목적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뛰어난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는 무척이나 약한 존재이고,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단 몇 순간도 견딜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 인간이 이 세상에 대해서 갖고 있는 자의식(自意識)이란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 지구상에서, 우주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려고 하고, 해석하고 원인을 규명하고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방법으로 자꾸만 정리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도 그때뿐이지요?
16. 이런 사람이 갖는 첫 번째 문제가 삶의 의미를 묻습니다<16면>. 왜 사는지, 사는 목적은 무엇인지, 왜 그렇게도 정신없이 움직이고 먹고 배설하고 싸우고 쌓고 이름을 세우고 만들어내고 소비하고 사는지, 그렇게 살아가는 의미가 무엇인지.... 물론 이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기도 쉽지 않지요.
17. 대답은 없습니다. 쉽게 인간에게 그 응답이 주어지지를 않습니다. ‘열심히 살고 그냥 아름답게 죽기 위해 산다’고 대답하기에는 뭔가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런 심각한 내부 문제(?)를 안고 있는 인간은 그래도 위대합니다. 비가 언제 올지 미리 알아내서 준비하기도 하고, 사람에게 해(害)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도 하고, 지구를 지배하고, 자동차를 만들어서 쉽게 움직이기도 하고, 내 의지(意志), 의사(意思)를 전하기 위해서 전화, 팩스 등도 쓰고 만들어냅니다. 가끔씩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장소가 아닌 곳에서 벌어지는 운동경기를 볼 수 있기도 합니다. 이런 요소가 위대함의 한가지 본보기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이렇게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고 치죠. 그것으로 끝납니까? 사람이 찾는 다른 요소가 또 생기기 마련이고 그것은 지금까지 개발되고 나열된 것만으로는 해답이 되질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또 다른 대답을 우리는 찾는 것입니다.
18. 이렇게 인간의 실상(實相)에 대해서 생각할 때, 더 안타까운 것은 ‘영원히, 내가 마음먹은 만큼 오래도록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서 시편 90장 10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70년, 근력이 좋아야 80년, 그나마 거의가 고생과 슬픔에 젖은 것, 날아가듯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바라는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일만큼은 그 어느 인간도 지금까지 해결한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지구상의 인구가 50억 명이 훨씬 넘지요. 아마 유사(有史)이래 지금까지 있어왔던 사람의 숫자를 모두 계산한다면 천억 명이 훨씬 더 넘을 지도 모를 겁니다. 이렇게 많았던 인간들 가운데 오래 살고 싶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겠죠. 중국에 있었다고 하던 진시황이 그랬죠. 불로초(不老草)를 얻으려고 어쨌다나 그러나 결국 땅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됐죠. 혼자 죽기 안타까워서 수많은 사람들도 함께 매장하기도 했다고는 합니다만.
19. 이렇게 인간이 갖고 있는 최대한의 근본문제를 생각하면, 인간처럼 비참하고 안타까운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아는데 도대체 풀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 하나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인간이 가진 한계입니다. 뭔가 탈출의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직까지 해결을 위한 방법이 제시된 것은 없습니다.
종교 언급
20. 여기에서 종교라고 하는 말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분히 인간으로서 느끼고 고민하는 문제에 대하여 답을 제시하려고 애를 쓰고, 사람들을 설득하는 문제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한계는 있습니다. 여기서 제시하는 문제를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래야만 할 필연성이 없는 거겠죠. 그렇다고 해서 답을 제시하지 않을 수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문제가 있으면 반드시 답이 있게 마련입니다.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서 그것이 맞는 답이 되는지, 아니면 부족한 답이 되어 새로운 보충을 해야 하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더불어 제가 가톨릭 교회의 신앙을 바탕으로 해서 제시하는 답을 여러분이 액면 그대로 수용해야 할 필연성도 없습니다. 다만 저는 종교와 신앙에 근거한 답을 제시하고 여러분이 수용할 수 있도록 할뿐입니다. 한가지 바란다면, 제가 앞서 제시한 것과 같은 문제를 여러분이 떠올리신다면 적어도 제가 제시하는 답이 한가지 응답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21. 종교와 신앙이라는 것의 특성은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갖고 고민하는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주지는 않습니다. 답이 될 수가 없죠. 사람이 겪는 문제가 그만큼 다양하다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만일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하는 그 순간 또 다른 의문의 요소가 바로 그 자리에서 생길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다만, 사람이 갖는 문제와 고민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어주는 것뿐입니다. 어느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들 나름대로의 대답을 주고 있는 것뿐입니다.
22. 원시종교도 그런 것의 하나입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두려운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원시시대라고 하는 때에는 사람 스스로 설 수 있는 토대가 약했기에 ‘인간보다 힘이 센 모든 것’이 다 신(神)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인간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제사를 지내는가 하면 그가 노여워했다고 화(禍)를 삭혀주려고 애를 쓰기도 했습니다. 요즘 현대의 시각(視覺)으로 보면 전혀 그럴 이유가 없는 것도 상당 수 있습니다.
23. 잘은 모르지만, 불교와 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시자가 인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 대한 말이고, ‘한가지 윤리규범을 설명하는 것이지 종교는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유교에 대해서 내리는 피상적인 평가요 판단입니다. 이 자리가 불교와 유교에 대해서 설명하는 자리도 아니고, 제가 그것을 설명할 만한 능력도 없는 사람이기에 간단하게 언급하겠습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던 인도 카팔라 왕국의 왕자 석가가 특별한 수행을 거쳐 거기에 덜 집착할 수 있는 수련의 방법으로 제시한데서 시작된 것이 불교입니다. 불자(佛子)라고 해서 인간이 겪는 그런 문제들을 겪지 않고 건너뛰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나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수도정념(修道情念)하는 것이 스님들의 생활입니다. 승(僧)이 되어 법을 깨치고 석가(=깨달음을 얻은 자)가 되어 해탈하고 열반에 드는 것이 그분들의 목표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잘못 설명했다면, 양해해 주시기를)
24. 유교는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윤리라 합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유교에는 내세라든가 인간 삶의 완성을 목표로 한다는 설명은 따로 없지 않을까 합니다. 다분히 살아있는 사람이 지켜야 할 삶의 규범들을 설명합니다. 살아서 돌아가신 분에 대해서 잘못 공경한다면 벌받는다는 것은 좀 단편적이고 과장된 ‘부분인용’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교
25. 또 다른 응답을 제시하는 종교의 하나인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를 정점으로 모인 신앙인의 집합체’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천주교와 개신교,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1517년이래 둘로 갈라졌고 지금까지 일치를 위한 많은 방법들이 제시되긴 했습니다만 아직은 머나먼 평행선입니다. 이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기름으로 축성된 자)’라고 불리는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로써 인간이 겪고 있던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었고, 그 답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삶의 변화를 이룬 뒤 그 삶을 일정한 형태로 형성시킨 종교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가 누군지, 하느님은 누군지, 그 예수가 살았던 삶의 본보기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생활은 어땠는지, 예수가 활동한 시대적, 정치적, 사회적 상황은 어땠는지를 알아보고 우리의 현실과 비교해 보는 것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알아보는 내용이 될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을 다루지는 않습니다. 더 많은 내용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합니다.
26. 이 그리스도교에 대한 골자를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과 하느님사이의 중재자이시다. 그는 하느님이면서도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약 30여 년을 살며 복음을 선포하다가 십자가상의 죽음과 부활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시키신 분입니다. 그리고 훗날에는 그 삶을 본받아 공동체가 생겼고 그 공동체를 통하여 인간에 대한 지속적인 구원의 가르침을 이어 내려오는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는 “단순히 창시자(?)가 행한 것을 반복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종교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제2, 제3의 그리스도가 되어 살 수 있는지 생각하고 노력하고 이 세상에 체현(體現)하도록 노력하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더불어 간단히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으로서 탐구하지만 해결책을 얻을 수 없고 그 과학에 의한 응답에 만족하지 못하는 문제들에 대하여 답을 주기도 합니다.
27. 종교라는 것이 그렇듯이, 현실의 생활과 떨어져 생긴 것은 없습니다. 이렇게든 저렇게든 사람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습니다. 그런 면에서 주어진 이 시간, 이 장소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언급될 그리스도교는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특정지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짧게라도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그리스도교를 설명하는 앞으로의 시간에도 역사 이야기는 꾸준히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주간의 간단한 요약
28. 지난 주 수요일에는 여러분들에게 사람의 생활에서 ‘종교가 자리하게 되는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서 인간이 주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살고 싶기는 하지만, 세상의 일을 한 부분이라도 자세히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사람이 주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보다는 그렇지 못한 일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그런 나약한 인간의 마음에 삶의 중심을 세워주는 역할을 종교가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여전히 세상의 일을 과학의 잣대와 기준을 가지고 해석하고 재는 사람에게는 그것마저도 자리할 수 있는 여유가 없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이 세상에 있는 종교에 대한 개괄적인 설명을 드렸습니다. 불교와 유교, 그리스도교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만 말씀드렸습니다.
29. 이제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본격적인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한계 내에서, 그리고 굳이 설명이나 인용이 필요할 때만 말을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를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러면, 이후의 과정은 그리스도가 누군지, 무엇을 한 인물인지, 그 인물의 행동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30. 먼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와서 사람들을 향하여 했던 말과 행동, 가르침, 기적을 통칭하여 복음(福音, GOSPEL)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복된 소리’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그(=예수)의 입으로부터 나온 것은 물론이고, 그의 행위로 인한 사람들의 변화, 그리고 그를 따르며 살았던 보여주었던 모든 것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희망을 갖게 해 주었던 모든 것, 다른 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인간대우를 받지 못했던 비천한 계급(?)의 사람들마저도 ‘아! 나도 사람중의 하나였구나! 그렇다고 한다면 나도 나 자신을 귀중하게 여겨야 하겠는데......’하는 영향까지를 불러일으킨 모든 것을 포함한다는 것입니다. 더 확장되는 의미는 다른 시간을 통해서 강조될 것입니다.
믿을 교리 편
역사상의 예수
31. 이 예수는 언제 태어났는가? 먼저 복음서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복음서>라는 말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서>라는 용어는 예수를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진 사실 보고서, 신앙고백서를 의미합니다. 눈앞에 일어난 사건을 일기로 쓰더라도 사람은 자신이 관심 갖는 일을 더 강조해서 다루기 마련입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서의 기록도 그러합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는데, 그 각각은 저자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전해지는 방식에 따라 불립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가, 요한의 복음서라고 편의상 그렇게 부릅니다.
이 네 가지 복음서 중에서 루가 복음서는 그중 연대기적으로 가장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루가 복음서 2,1-7사이에 그 시대 언급이 나옵니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가 호구(戶口)조사령을 내렸을 때......’라고 기록합니다. 신앙고백서인 루가 복음서에 언급된 시대를 역으로 계산하여, 역사가들은 시대산정을 하기를 ‘아우구스티누스 황제가 호구 조사령을 내린 때’를 가리켜서 기원전 약 4년경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계산하는 ‘서기 원년’은 훗날 잘못된 계산(로마제국 건국 754년)에 의하여 달라진 것입니다.
32. 우리가 사는 생활에서도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의 탄생이라는 사실이 당시의 역사가들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은 되지 못했는지 동시대의 기록은 없습니다. 그런 사정은 요즘에도 비슷합니다. 누군가 태어났으면 그뿐이지, 그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누군가 역사로 기록하겠다고 덤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그 특정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게 부각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탄생 때는 어떠했는지, 성장과정에는 어떠했는지, 자라면서 누구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는지 법석을 떨면서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예수에게 적용된 과정도 같을 것입니다. 훗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공동체, 그리스도교가 이름을 얻게 되자 몇몇의 기록이 나오긴 합니다. 그 몇 가지 예가 <초대받은 당신> 책의 29면 하단 3줄-30면 상단 8줄까지 나옵니다. 함께 보시면 더 참조가 되리라 봅니다. (함께 살펴본다)
33. 이 예수에 대한 역사성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또 다룰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이 있다면, 이 예수가 비중이 있는 인물은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인물의 존재성만큼 논란이 있었던 인물이 또 없기 때문입니다. 덜 중요하거나 무시할 수 있었다면, 논란거리도 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종교만 따져도 가톨릭 약 10억, 개신교 ??억. 그리고 그 인물이 남겼던 행위와 그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된 여러 단체의 역할들이 그것을 반증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언급은 할 수 있겠지만, 새삼 존재의 여부에 대한 논란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오히려 거기에 들이는 시간과 힘의 소모보다는 그 인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알아듣고 달라져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 여부가 더 필요한 일이라고 봅니다.
34. 이 인물 예수는, 지금부터 약 2000여 년 전, 이스라엘(=당시에는 국가의 명칭도 없었습니다. 로마의 속주였고 변방이었으므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속주 정도로 알려졌습니다)이라는 나라에서 매우 흔한 여인의 이름이었던 ‘마리아’와 아버지 ‘요셉’으로 이루어진 가정에 태어난 인물입니다. 그러나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과거의 나라와 그 역사를 통해서 준비해온 결과에 따라서 ‘약속의 때’가 다 되어 이 세상에 인간으로 ‘하느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분이라는 것이 가톨릭의 신앙,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의 핵심입니다. 신앙에서 분명히 하는 것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이지만, 아버지는 요셉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아버지를 지칭할 때 말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가리켜서는 기르신 아버지라 해서, 양부(養父)라고 부릅니다.
계시
35. 인간으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그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제 6과 ‘하느님과 계시’ 부분의 이야기입니다. 가톨릭 신학의 한가지 용어인 ‘계시(啓示)’라는 말의 의미는 영어로 'REVELATION'으로 씁니다. 낱말을 분해하여 설명하면, ‘닫혀있던 장막을 걷어내어 감췄던 것을 보여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행위의 주체는 인간이 아닌 하느님뿐입니다. 주체도 하느님이시고, 보일 수 있도록 해주는 객체(=대상)도 하느님이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럼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느님을 볼 수는 없는가?’ 대답이야 여러 가지로 할 수 있습니다만, 성서에 나오는 답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3,20에 “나의 얼굴만은 보지 못한다. 나를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고 선언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3,23에 하느님은 한가지만은 인간에게 허락하십니다. “뒷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36. 그래서 신학에서 설명하고자 할 때 인간은 하느님을 직접 볼 수 있는 능력은 없지만, 자연의 사물, 우주 만물의 신비, 천체의 조화, 인간의 양심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고 체험하고 만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에 대한 설명이 <초대받은 당신> 제 6과의 다른 부분들 설명입니다.
세상이 저절로 생긴 것도 아니고 자연적으로 질서를 지켜서 운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느님이 정하신 법칙과 규정이 담겨있다는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만물의 생성부터 관련되어 있는 것도 있습니다. 인간의 탄생 역시도 하느님의 작품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학의 이야기를 ‘창조론’이라고 하는데, ‘진화론’과는 배치가 됩니다.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것은 보류하고, ‘창조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인간의 귀중함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하찮게 여기거나 인간 생명의 유지와 발전을 위한 도구로 흔히 생각하고 다루는 동물들에서 진화되었다고 믿는 ‘진화론’을 일부러 나쁘게 볼 이유가 조금도 없습니다만, 인간을 진화론보다 상대적으로 귀중하다고 보는 것이 창조론 입니다. 인간이 쉽게 접근하지 못할 최고 지성의 존재가 인간의 근원이라는 믿음이 바로 창조론 입니다. 인간뿐만이 아니라, 다른 생물들도 역시 기원을, 출발점을 하느님에게서 찾는 것이 창조론 입니다.
37. 사람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잘못을 했을 때 가책을 느끼게 하고, 선을 행했을 때 격려의 마음을 갖게 하는 ‘양심’을 통해서 하느님의 존재를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에는 이러한 보조수단을 넘어 당신의 아들이 직접 인간 세계에 내려와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시키는 작업을 했는데, 그 인물의 이름이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 인물을 통하여 움직이신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이 직접 움직이시는 것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인간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훗날 다시 한번 더 반복이 되기는 하겠습니다만,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개념을 들어서, 하느님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서 창조주이신 하느님, 인간과 하느님 사이를 화해하기 위하여 인간으로 이 세상에 임하신 성자로서의 하느님, 우리 인간들과 교회를 이끄시는 힘으로서의 성령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나타나시는 모습(=양태,樣態)을 구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쉽게 알아듣고자 하는 방법과 하느님이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계시(啓示)에 의하여 구별하는 것뿐입니다.
38. 이 예수는 하느님이 정하신 때가 되자 인간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십니다. 역사적인 배경으로 이 인물 예수에 대한 것을 다루는 간략한 이야기가 <초대받은 당신> 책 7과 8과의 내용입니다.
예수는 그저 하늘에서 뚝 떨어져 우리에게 번개처럼 나타난 것이 아니고, 세례자 요한도 예고했던 것처럼, 과거의 예고가 실행된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였습니다. 예수님에 앞서서 그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복음서에 소개됩니다. 마태오 3,11-12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 그 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라고 요한은 예수에 앞서 오면서 예수를 그렇게 소개합니다.
39. 이 예수가 이야기한 것을 주제로 소개하면, 그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이 누구인지 따로 이야기를 해야 하겠습니다만, 하느님의 뜻이 통하는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며, 그 하느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뜻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펼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면, ‘하느님 나라의 건설’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씀을 통하여, 가르침을 통하여, 기적을 통하여, 결국에는 당신의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죄인으로 처형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따른 인간으로서의 예수, 당신의 아들 예수를 십자가의 죽음에서 살려내시고 승천하게 하시고, 그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공동체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펼쳐 가십니다. 그 공동체의 이름은 ‘교회’입니다. 제대로 된 의미에서의 교회라고 한정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보고 나서 실망할 수 있는 그런 나약한 모습을 지닌 교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의 교리내용 정리
40. 지난 주 수요일에 저는 가톨릭 교회의 시초와 그 출발점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예수의 위상(位相)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습니다.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시대적인 상황에 맞춰 설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예수에 대한 것은 반복하여 말하자면, 역사를 우선으로 해서 볼 것이 아니라, 신앙을 우선으로 해서 봐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마련한 과학이라는 것으로 해석 또는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뒤로 미루긴 했지만, 간단한 말씀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신앙과 신약의 중심인물인 이 예수에 대해서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바탕을 간략하게라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역사의 구별을 위한 개관
41. 역사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역사, 그래서 후대의 사람들이 남겨진 흔적들을 이용하여 과거의 생활을 추정해 볼 수 있게 하는 역사가 있고, 두 번째는 구전(口傳)역사라 할 만큼 이 세상의 흔적과 비교하여 연구할 수 없는 ‘무형의 언어로 전해진 역사’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중요성은 인정하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우리 나라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해당되는 부분이 후자의 ‘무형의 언어 역사’가 될 것이고, 삼국시대 이후에 대한 것이 전자의 ‘흔적을 남긴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 양자는 서로 충돌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보완을 하지요. 하지만 한가지 기준을 가지고 다른 것을 재고 연구하면 그 존재의 의미가 쇠퇴하게 됩니다.
42. 성서에 대한 역사도 마찬가지로 크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서는 이스라엘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서에도 앞서 말씀드린 두 가지의 성격의 역사관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구별하기 전에, 먼저 한가지를 정리하겠습니다. 전에도 강조한 경우가 있었지만, 성서는 ‘신앙고백서’라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랬기에 과학으로 바라보고, 흔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려는 사람들의 기대에 걸맞지 않게 그들의 역사기록인 성서에는 하느님이라는 용어가 심심찮게 등장합니다. 또한 그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는 예언자들의 소리도 나타납니다. 그들이 역사를 기록한 방식은 간단하게 말하면 이러합니다.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잘 된 일이 있었으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을 잘 따랐기 때문이고, 혼란과 걱정과 전쟁이 닥쳤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과 행동이 하느님의 뜻에서 멀리 떨어진 생활을 했다는 소리가 됩니다. 그러므로 다소간 실망감이 앞서겠지만,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고 이스라엘의 역사인 성서를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43. 이 시간에 제가 여러분에게 이스라엘의 역사를 언급하는 목적은, 특별한 목적이 있는 역사언급이요, 역사공부입니다. 우리가 가서 살 나라도 아니고, 개개인의 구체적 생활과 별반 관련도 없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공부하는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들을 통하여 이루어진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섭리를 우리가 깨닫고 우리 삶의 역사에서 반복하거나 축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찾아보기 위해서 공부한다는 것뿐입니다. 그 이상의 것도 그 이하의 목적도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우리가 안다고 해서 우리 지식의 면에서 크게 달라질 것도 불편할 것도 없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합니다.
44. 성서를 보면서 앞서 말씀드린 ‘유형과 무형의 역사’구별과 그 적용은 이렇게 합니다. 구약성서의 첫째 권인 <창세기 1-11장>까지를 무형의 역사로 구분합니다. 그 이후에 나오는 이야기는 흔적이 있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이 흔적이 있는 역사에 나오는 많은 것들의 바탕에는 물론 무형의 흔적이 자리를 잡습니다. 무형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 뒤에 흔적을 이룬 삶의 기록도 참된 의미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45.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나라는 기원전 1250년경에 등장합니다. 흔적이 있는 역사의 모습으로서 말입니다. 이때는 우리가 구약성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출애굽기의 역사가 이루어진 때로 추정합니다. 성서의 역사에도 그렇게 나오고 이집트 역사에도 간략하지만 그 언급이 나옵니다. 시초의 역사란, 이집트에서 고난을 겪던 셈족과 그 후손의 한 부류들이 고난과 압제를 피해서 그곳을 떠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느끼기에 그렇게 떠난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은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었고,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었으며, 고난과 억압에서 하느님께 부르짖으니 그 하느님이 구원이라는 선물로 응답해 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체험은 훗날 그들의 역사를 이루는 근간이 됩니다. 즉 그들은 모든 것의 시작을 하느님과 관련시켜서 생각했고 그분의 섭리와 인도에 따라서 자신들의 삶이 이루어진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가 그들을 향하여 ‘왜 그렇게 옹졸하게 보는지, 그렇게 보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기록할 수는 없는지를 물어도’ 아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 역사의 시작이고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46. 그렇게 해서 시작한 그들의 역사를 간단하게 시대별로 언급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인 역사가들의 분류에 따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의 인도에 따라 기원전 1245년 경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그리고 약 40년의 광야생활 후, 요르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의 경계에 도착합니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는데(버스를 타고 이집트의 경계에서 이스라엘 땅의 경계까지는 약 9시간이 걸립니다. 대략 400킬로 정도), 그렇게 가까운 거리를 두고 약속의 땅이라는 곳에 들어가기까지 왜 40년을 광야에서 헤매야 했는지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신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광야 생활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반항합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대신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던 모세마저도 믿지 못하겠다고 덤비며, 결국 시나이 산 아래에서는 하느님을 눈에 보이는 동물의 형상인 ‘금송아지’로 바꾸기까지 합니다. 그 잘못으로 인하여 반항하거나 항거했던 성년(成年)층의 사람들이 모두 죽기까지 40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이 기간이 지난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서 가나안 땅에 진입하고 약 100-150여 년에 걸쳐서 그 땅을 조금씩 점령해 나갑니다. 그때에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간간이 활동했던 하느님의 대리자들을 가리켜 판관들(또는 사사)라고 합니다. 그들의 이런 인도에 불만을 느낀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변의 민족을 따라 왕정(王政)을 세웁니다. 이 왕정을 세운 것을 하느님의 예언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시고 싶지 않아서 인간에게 마음이 돌아선 것>이라고 말입니다. 급기야는 이 지도자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편의와 생각에 따라 노역, 병역에 동원합니다. 이미 하느님께서 언급하셨던 결과대로 이루어갔다고 성서는 언급합니다. 자세한 역사에 대한 것은 우리가 성서를 읽어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첫 왕이 ‘사울’이었고, 다음 왕이 ‘다윗’이고 그 다음이 ‘솔로몬’이었습니다. 이 솔로몬은 세상에서 그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없었을 만하다고 칭찬을 받은 지혜 있는 왕으로 통합니다. 그가 지혜를 받은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다고 열왕기(상권, 3장)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받은 지혜가 끝까지 지켜지지 않았기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나라는 남과 북으로 기원전 935년에 갈라집니다. 그리고 북쪽의 왕국은 기원전 722/721년에 아시리아라는 국가에 멸망합니다. <성서는 이 왕국의 멸망을 가리켜, 북쪽 이스라엘 왕과 그 백성들의 마음과 정신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소개합니다. 한 왕국의 흥망성쇠를 그들은 그렇게 신앙을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우리가 요즘 역사를 바라보듯이 군사력이 부족해서거나 정치권력자가 부패했다거나 하는 방법으로 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사람들의 마음이 멀어졌기에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멸망할 때까지 북쪽 왕국 이스라엘에는 많은 예언자들이 등장하여 마음을 돌릴 것을 간절하게 호소하지만 그 소리는 마이동풍(馬耳東風)이 되고 맙니다.
그로부터 약 240여 년 후, 남쪽 왕국 유다 역시도 바빌론(기원전 587년)에게 멸망합니다. 그래도 남쪽의 왕국은 나았지만, 그들도 역시 마음과 삶의 정신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기에 멸망할 수밖에 없다고 예언자들은 설명합니다. 국가의 힘이 약했다거나 주변 민족의 힘이 강했다고 하는 것은 순수 역사적인 면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판단이고 성서의 역사는 그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요즘의 사람들처럼 과학을 우선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성서는 역사 변형의 원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서는 순수한 역사기록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록한 신앙고백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멸망했던 남쪽 유다 왕국을 50년 정도 후인, 기원전 538년에 이방인의 왕 고레스의 칙령을 통하여 해방시킵니다. 이것 역시도 고레스라는 페르시아 왕, 이방인의 왕이 한 일이었는데, 성서는 그를 통하여 하느님이 당신의 역사를 준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이방인의 왕, 하느님을 몰랐던 그가 왜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켰는지는 모릅니다. 성서는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그렇게 시행했다고 적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 역시 현대 시각으로 볼 때 해석할 수 없는 역사의 순환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방되어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여기저기에 흩어지는 운명을 겪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지배하에, 그리스의 지배하에, 기원전 63년에는 로마의 지배하로 들어가고 맙니다. 이렇게 로마의 지배를 시작으로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의 이름을 앞세우고 다시 등장한 것은 기원 후 1947년입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난 다음입니다. 약 2000년이 훨씬 지나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그들이 국가를 세울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사실은 모릅니다.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삶의 중심으로 해서 돌아오려고 했기에 그랬다고 적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몇 마디로 구별하면, 순수한 역사는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안에 일어난 모든 사건과 일에 대해서 그 기원과 잘․잘못의 모든 기준을 하느님께 두었습니다. 그렇게 신앙 중심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바라보았고, 그들은 그 정신에 따라서 기록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았다고는 했지만, 그것은 순수한 역사가 아니라 그들이 역사에 대해서 바라본 시각을 익혔을 뿐입니다.
우리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의 비교
47. 이 땅에 나타난 역사의 기록은 가장 빠른 것이 삼국유사, 삼국사기로 고려시대의 것입니다. 이 지구상에 흔적을 남기는 역사이지만 서로 기록의 시점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약 900년 정도가 채 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기록을 남길 줄 알았고, 기록을 남기면서도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라든가 기록의 나열이 아니라, 이미 반성과 비판을 겸한 그런 역사의 기록을 남긴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 이스라엘 백성을 우리보다 특별히 낫게 보고 싶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된 것뿐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삶의 기준을 잡는다면 어디에다가 해야 하는지 신비로울 뿐입니다. 역사의 기록이나 반성의 이야기가 이스라엘의 것처럼 이 세계에 널리 읽혀지고 쓰이는 것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모르긴 해도 하느님이라는 대상, 이스라엘 백성들이 항상 돌아보는 기준으로 세웠던 그 분이 차지하는 비중이 이 세상의 그 어느 것에 견줄 수 없을 만큼 남다르기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흔적이 남아있지 않은 원역사(原歷史), 신앙에서만 설명 가능한 역사
48. 이처럼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기록할 줄 알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세상의 기원과 그 발전에 대한 시초의 믿음도 기록합니다. 그 내용이 창세기 1-11장에 나오는 이야기가 그것이므로, <흔적이 남지 않는 역사, 原歷史>입니다. 원역사 부분에는 세상과 만물의 기원<창세기 1장-2장>, 인간사이에 죄악이 들어오게 된 과정<인간의 욕심-선악과, 첫 살인><창세기 3장>, 전설적인 이야기인 노아의 홍수얘기<창세기 6장-9장>, 이라크에 있다고 전해지는 바벨탑(=지구라트 유적)<창세기 11장>과 인간 세계에 다양한 언어가 생긴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성서의 첫머리에는 인간과 만물이 생긴 출발점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앙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학문 세계에서는 ‘창조론(創造論)’이라고 합니다. 이 창조론을 몇 마디의 말로 설명하면 ‘만물의 기원은 하느님’이라고 하는 소리입니다. 흔히 과학에서 이야기하는 ‘진화론’이라는 이론과는 배치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보면,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진화의 발전 단계에 있는 중간동물이 이 세상에 없다는 것 (꼬리뼈의 흔적이 있다고 해서 꼬리 있는 동물에서 진화되었다고 말하는 허구성)
* 우리들의 원시조상에 대한 동종(同種)들을 함부로 대하는 면(잡아먹고, 가두고 째고 봉합하는 행동에서)
*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인 사안을 비교하면 인간이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 않다는 면에서
* 동물에 비해서 세상에 떨어진 다음에 홀로 서는데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데 비해서
* 인간을 그저 동물의 한 종류에서 변종된 돌연변이로 설명하는 진화론--왜 모든 것을 지배하는지 설명할 수 있나?
* 하지만, <창조론>은 하느님이라는 대상을 설정하기만 하면 모든 의문점이 풀린다. (식물먹고 -->동물도 양식으로)
* 인간을 하느님의 모상(模像)을 닮은 귀한 존재로, 하느님의 뜻을 따라 동물을 지배하는 존재로 설명, 하느님을 빼고서는 인간의 생명 좌우지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음
세상만물의 창조와 인간에 대한 하느님에 대해서
49. 빛 어둠, 창공 위아래의 물, 땅과 바다 식물, 해 달 별, 물고기 새, 동물과 사람의 순서에 따라 창조합니다. 이 내용에 따르면 과학이라고 하는 잣대로 설명은 하지만, 진화론을 중심으로 하는 이론보다는 인간을 더 진실하고 가치 있게 대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성서의 세계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에 대한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창세기 11장까지는 역사의 바탕을 찾을 수 없는 원역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노아의 방주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성서의 본래의도를 아직도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한없이 높아지고자 하는 욕심이 발동하여 인간은 범죄하고<우리가 사는 세계도 비슷하지 않을까>, 악이 인간 세계에 들어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끊임없는 사랑을 베풀겠다고 약속하시는 하느님을 볼 수도 있습니다 <--원죄(原罪)-->. 이처럼 인간이 끊임없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고 발버둥을 쳐도 하느님은 무시하지 않으셨다고 성서는 그 믿음을 고백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에 인간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원죄라고 칭하는 선악과를 따먹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인간에게 가죽옷을 해 입히시고 구원의 구세주를 약속하시며, 동생을 죽인 형님 카인을 쫓아내면서도 다른 이가 함부로 죽이지 않도록 표를 하겠다는 보호약속도 하시고, 노아의 홍수로 인구가 별로 남지 않게 되었을 때도 계속해서 종족이 늘어날 수 있도록 해주시고, 먹을 양식도 늘려주시고<최초에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창세 1,29)--> 훗날 고기까지 허락(창세 9,3)>, 하느님이 계시는 곳까지 한없이 교만해지는 인간의 잘못을 보면서도 언어를 섞어놓는 일만을 하시는 하느님의 참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50. 이 하느님에 대한 내용이 여러분의 교재 16과에 나옵니다. 사실 하느님이라고 하는 개념은 진화론이 아닌 창조론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모든 것을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풍조에 젖어든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서 알려고 도전하다가 쉽게 지치고 맙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면서 하는 말, ‘하느님은 인간 세상에 일어나는 고통과 슬픔에 대해서 별 관심을 갖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때때로 가끔씩 주무시거나 졸음에 겨워 눈을 비비시는 분이다, 하느님은 내가 고생을 하고 고통을 겪는 것을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시는 고약한 분이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하느님은 계시지 않는다(=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신다).’고 정리를 하고 맙니다.
51. 그러나 하느님을 일찍이 자신들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공경해왔던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에 가장 가까운 계시는 분으로 성서는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 분(신명 4,7), 야훼여 당신은 가까이 계시며(시편 119,151), 그랬기에 인간이 잘못된 길로 나아갈 노심초사하며 구원의 길에서 멀어질까 끊임없이 걱정하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당신의 아들을 시켜 이 세상을 구원할 방법을 찾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그것이 구약성서에서는 ‘정의를 지키고 이끄시는 하느님’으로 신약성서에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 하느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마음대로 개념을 정하고 정리합니다. 그렇게 정리할 때 가장 먼저 부딪히는 것은 ‘진화론,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을 파악하고 설명할 때 생기는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이라는 이름과 하느님이라는 두 가지 개념은 병존(竝存)할 수 없는 용어입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은 영원한 평행선을 긋는 것이며, 결코 만날 수 없는 두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으로 저것을 판단하고 규정하려고 해도 안될 것이고 그 반대로 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할수록 사람은 혼란만 더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그 기원을 두고 있고 그 하느님으로부터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 이야기한다면, 인간은 결코 하느님을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재간이 없습니다. 만일 가능하다고 우긴다면, 그것은 물이 없어도 물고기가 숨쉬고 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하거나, 동그란 네모가 존재할 수 있다는 우격다짐과도 같은 일이 될 것입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개념은 없지 않습니까? 사람이 처음부터 그렇게 정했으니까 말이죠.
성서 - 초대받은 당신 17 과
52. 성서에 대해서 처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성서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성서는 우리가 한자로 聖書라고 씁니다. ‘거룩한 책’이라는 한자의 뜻을 빌어서 씁니다. 왜 거룩하다고 이름을 붙이는가? 그것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보는 뜻이며 설명에 따라서 달라집니다만, ‘하느님의 뜻을 담은 글’이기에 그렇다고 먼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모든 내용이 다 거룩한가? 라고 우리는 물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각각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보다는 왜 그런 용어를 쓰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성서는 한 사람이 쓴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성서가 지금의 형태로 자리잡는 데에 꽤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다. 단편적이긴 합니다만, 글로 남겨지지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최소한 3400년 전 이상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리고 지금의 형태로 차츰차츰 자리잡은 것은 기원전 900년경 전쯤으로 일반적으로 정합니다. 이 시대는 솔로몬 왕정시대입니다. 물론 이 시대에 완성된 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지만, 이때부터 모세 오경부터 시작하여 글로 하나씩 둘씩 쓰여지기 시작합니다. 어디까지나 이것은 역사적인 구별에 의한 것입니다. 구약성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글로 남은 것은 <마카베오서 상하권>정도로 일반적인 구별을 합니다. 역사의 배경을 보면, 기원전 140년 전 후의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53. 성서는 단순한 역사의 기록은 아닙니다. 성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백성들은 하느님의 선민(選民)이라는 의식을 갖고 살았던 사람들이 기록한 ‘반성과 삶의 회고록’이라고 하는 편이 아마도 더 올바른 표현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광스러운 일은 물론이고, 사람이면 숨기고 싶을 만한 개인적인 일들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서는 믿음의 고백서라고 하는 표현도 가능할 것입니다. 자신들 민족의 기원과 그 흥망성쇠를 적고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역사와 흔적을 맞출 수 없는 ‘원역사’도 거기에는 적혀 있습니다. 이 원역사는 다른 말로 하면. ‘신화(神話)’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이 원역사의 부분은 창세기 1-11장까지를 지칭합니다.
54. 성서는 또한 하느님의 계시를 적어놓은 책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몇 가지의 의미 외에도, 성서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느님이 인간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알리는 이야기, 말씀, 예언에 관한 이야기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군가 직접 들었기에 쓴 내용은 아닙니다. 지금 말씀드린 몇 가지의 뜻을 담아서 짧게 이야기하면, ‘성서는 믿음의 기록’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내용에 따라서, 역사서, 예언서, 묵시록, 복음서, 서간서, 교훈서, 시편 분야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이야기만을 담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자신들에 관한 역사와 삶의 이야기를 하느님의 뜻과 비교하고 그 반성들을 기록할 줄 알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세상에 남겨있는 그 어떤 역사서보다도 많이 읽히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비교하는 것은 성서에 비할 것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55. 이 성서는 분명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언어로 쓰여졌습니다. 최초의 기록단계는 이스라엘 말인 ‘히브리어’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이 국가가 시간이 흐르면서 멸망하고, 그 민족의 백성들은 세계의 여러 곳으로 흩어집니다. 유배이후에는 다시 잠시 모이기도 합니다만, 그네들 민족이 분산되는 결과에 따라 기원 전 300년경에는 그리스말인 ‘희랍어’로도 번역이 됩니다.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히브리어로 쓰여졌던 성서가 그리스말로 번역되는데는 72명의 학자들이 72일간에 걸쳐서 번역했다고 하여 이것을 약칭하여 ‘70인역’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70인 역(譯)은 구약성서의 제 1 경전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개신교에서는 제 1 경전만을 구약성서로 인정합니다. 하지만 천주교에서는 훗날 희랍어로 쓰여진 7권까지를 포함하여 성서로 인정합니다. 훗날 희랍어로 쓰여진 구약성서는 제 2 경전이라고 분류하여 부릅니다. 간단히 성서는 이렇게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제 1경전=39권, 제 2 경전(외경)=7권, 합계 46권이 구약, 신약은 27권으로 구별합니다. 신약성서와 구약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해서 구별합니다.
56. 이렇게 사람의 언어로 쓰여졌지만, 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이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靈感 : INSPIRATION)'을 받아서 기록되었다고 규정합니다. 순수한 인간의 이야기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우리가 거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는 뜻이 됩니다. 하느님의 힘, 영감은 단순히 인간을 그저 ’로보트‘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영감을 이해하는 참의미가 됩니다. 인간의 말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57. 이 성서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고 생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많은 논란거리였습니다. 성서를 누가 해석할 수 있고, 누가 읽을 수 있는지 하는 문제가 커다란 논란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애석하게도 가톨릭에서 일반 신자들이 성서를 쉽게, 자신들의 언어로 대할 수 있도록 한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잘못 해석되고 그 가르침이 잘못 적용되었을 때, 생길 수 있는 오류가 컸음을 알아보고 그랬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그에 비교해서 가톨릭의 미사에서 ‘말씀의 전례’ 부분만을 강조하는 개신교에서는 일찍부터 성서를 자의적으로 번역해왔고 마음대로 적용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이 완벽하게 해석할 수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해석하기 시작하고 알아들으려고 노력한 것이 약 2000년 또는 그 이상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지금도 새롭게 번역되고 새롭게 해석을 시도하는 글들이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성서를 해석하고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책임은 ‘교회의 교도권(敎道權)’에만 인정돼 있습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성서를 보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 뜻은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알아들으려면 교회가 제시하는 가르침과 규정을 준수하면서 봐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58. 우리가 성서를 대하는 자세도 거기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구원역사를 담고 있는 것, 끊임없이 하느님의 뜻에서 빗나가기만 하는 인간들을 향하여 당신의 뜻을 전하고 있는 것이 성서라고 생각할 때, 우리가 성서를 올바로 대하는 방법은 그 성서를 통하여 하느님을 대하듯이, 하느님을 만나듯이, 하느님의 말씀을 내가 지금 이 순간 다시 듣는 마음과 자세로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들을 때 인간에게는 구원이라는 선물과 삶을 바르게 이끌어갈 수 있는 지혜를 거기에서 배우게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 교재 18 과 ~ 23과
59. 이제는 우리 신앙의 중심인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펴볼 차례입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은 믿음의 고백이 주안점을 이룹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고 확인한 내용만을 사실로 여기고 그것만을 다루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소리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인물과 그가 했던 역할이 신앙인들에게는 커다란 의미를 갖고 다가오지만, 신앙인이 아니었던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에 대한 기록은 일반 역사가들의 기록에 많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5과에서 언급했음을 기억시킬 것). 그러므로 여기에서 다루게 되는 인물 예수는 신앙을 고백한 기록들인 성서를 중심으로 보겠다는 것입니다.
60. 예수는 처음부터 하느님에게서 예고된 분이었습니다. 세상을 창조하던 시대에 인간은 범죄를 통하여 하느님에게서 멀어집니다(==>원죄(原罪)). 그러나 최초의 인간들이 그렇게 멀어지긴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사랑의 손길을 거두지는 않습니다. ‘뱀과 여인의 후손사이에 원수를 맺어주리라.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뒤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머리를 밟힐 것이라’는 예언을 통해서 인간에게 죄악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당신의 섭리를 예고하십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서 ‘원복음(原福音)’이라고 합니다. 또한 이사야 예언서 7장 10-17절에 나오는 임마누엘 예언을 통해서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61. (임마누엘 예언)(이사야 7,10-17)
10 야훼께서 아하즈에게 다시 이르셨다. 11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께 징조를 보여 달라고 청하여라. 지하 깊은 데서나 저 위 높은 데서 오는 징조를 보여 달라고 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나는 징조를 요구하여 야훼를 시험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13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어라.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도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도 성가시게 하려는가? 14 그런즉, 주께서 몸소 징조를 보여 주시리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될 때는 양젖과 꿀을 먹게 될 것이요, 16 그 아기가 나쁜 것을 버리고 좋은 것을 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네가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는 저 두 왕의 땅은 황무지가 되리라. 17 야훼께서 아시리아 왕으로 하여금 너와 너의 겨레와 너의 왕실을 치게 하실 터인즉, 그 날은 에브라임이 유다와 갈라지던 날 이후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불행한 날이 되리라.
: 임마누엘의 예언의 의미는 이러합니다. 유다의 왕으로 등장했던 아하즈가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당시 그가 다스리던 때에 아시리아가 쳐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집니다. 그러자 아하즈는 전쟁을 대비하여 저수지의 물을 확인하러 갑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얼마나 견딜 수 있겠는지를 계산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그것을 보신 하느님께서는‘ 아하즈가 하느님을 믿고 따르지 않고, 인간적인 생각만을 먼저 한다고 섭섭하게 여기시며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고 차라리 떳떳하게 하느님의 징조를 청할 것을 요구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하느님을 따른다고 알아주겠고 네가 불안해하는 외국의 침공도 해소시켜 줄 수 있다고 하시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즈는 그러한 청을 하기를 거부하죠.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위상에 먹칠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무식하게(?) 정면돌파를 하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의 잉태, 임마누엘 예언을 하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예언대로 성취되었다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복음서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 1,22 :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의 탄생
62. 이렇게 태어난 예수에 대해서 그의 탄생에서부터 일생동안 벌어졌던 일들을 간단하게 언급할 차례입니다. 이 예수는 기원전 4년경에 이스라엘이라는 땅에 태어납니다. 하느님의 선언과 예언자들의 예언을 따라서 탄생하는 일이었지만 그의 탄생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으로 성서는 전합니다. 아기가 생길 때부터, 그 앞에 닥쳐온 시련은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먼저 다윗의 후손, 그의 혈통을 잇는다는 일이 급했었는지 어찌했는지 모르지만, 예수는 아버지를 ‘요셉’으로, 어머니를 ‘마리아’로 하는 가정에 태어나게 됩니다. 그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마태오 복음서 1,18-25에 나옵니다. 그것을 몇 마디의 말로 이야기하면, 천사가 전하는 바에 따라, 여인 마리아가 ‘혼전임신’을 합니다. 정식으로 결혼식을 하기 전에 아기를 갖습니다. 요즘 이야기로 하면 ‘미혼모’라고나 할까요? 물론 성서는 그의 이러한 임신과 탄생에 관련된 소식을 하느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태어날 준비를 하게 된 예수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치세 때에(루가 2,1-7 참조) 베들레헴이라는 동네의 마구간에서 태어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렸고(고향에 가서 인구등록을 하라는 조건 때문에), 고향에는 방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처음으로 눕혀집니다. 그러나 이때에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서 황금(=왕), 유향(=하느님), 몰약(=죽음)을 선물로 받고(마태 2,1-12), 동방의 박사들이 헤로데를 거쳐서 왔고 그에게 태어난 장소가 보고(報告)되지 않자, 동방의 박사들이 떠난 베들레헴으로 군사가 파견되고 이 사건을 천사를 통하여 미리 알게된 요셉과 마리아는 에집트로 피난길을 떠나게 됩니다(마태 2,13-15). 그렇게 피신했다가 헤로데가 죽고 난 다음, 나자렛이라는 동네로 와서 정착하게 됩니다.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니 다윗의 후손이 된 것이고, 성장은 나자렛에서 했으니 훗날 ‘나자렛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 나오겠소. 성서를 찾아보시오. 나자렛에서 위대한 인물이 나온다는 소리는 없소’라는 소리까지 듣게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 I. N. R. I )
63. 이 예수는 아버지 요셉의 직업이 목수였던 관계로, 훗날 목수로 알려지기도 합니다. 이 예수가 12살(=유다인의 성년식 나이) 때에 성전에 가서 있었던 이야기(루가 2,41-52)가 루가 복음서에 전해집니다. 뚜렷한 교육도 받은 것 없이 율법을 공부하고 연구하던 학자들과 토론을 하고 뛰어난 인물이 될 가능성을 보였던 일이었습니다. 위대한 인물은 어릴 때부터 알아본다고 하나요?
예수의 공생활 시작
64. 이렇게 나자렛에서 자란 예수가 소년기를 거쳐 30살 가량(루가 3,23참조)에 전도생활을 시작합니다. 물론 이 예수에 앞서 세례자 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성서에 기록된 대로 선구자로서 예수를 알리고, 회개의 세례를 선포합니다. 물론 예수도 처음에는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습니다. 구약에서부터 있어왔던 의미에 따르면, 이 세례는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뒤쫓음에서 살아난 것을 기억하는 ‘홍해 도하(渡河)’라고 해석합니다. 홍해를 건넘으로써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게 되었듯이, 세례를 통해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된 세례자 요한의 세례식은 훗날 교회에도 같은 의미로 그대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리고 이 예비자 교육 과정을 마치면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에게도 모양을 달리하여, 세례식을 거행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세례예절은 간단합니다만, 그것이 차지하는 의미가 워낙 다양하기에 가톨릭교회에서는 그 세례를 위한 과정이 복잡한 것입니다.
그 복잡한 과정 때문에 여러분과 함께 하는 이 예비자 교리 시간도 만들어지고, 제가 순서에 따라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65. 이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고 첫 선언합니다. 우리가 예비자 교리를 통해서 예수님이 던지신 이 말씀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드리는 모든 내용을 축약(縮約)하는 것이라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다양한 뜻이 있기에 그것을 설명하는 내용과 여러분들이 할애해야 할 시간이 많은 것입니다. 하느님에 관한 소리를 인간이 하고, 그 소리를 우리가 알아듣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이 투자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66. 첫 선언을 하신 예수님이 하기까지 예수님이 행하신 일의 순서를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조금 전에 말씀드린 세례자 요한에게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이 때에 성서는 또 한가지의 신비스러운 모습을 전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일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았을 때,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의 모양으로 예수님에게 나타나고,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마르 1,11)이라는 말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비둘기의 모습을 본 사람도,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은 사람이 따로 있었다는 말을 전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이렇게 나타나는 모습을 ‘세례’때에 적용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으면, 우리의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이 교회에서 유지하고 있는 삶의 정신입니다.
예수에 대한 악마의 유혹
67. 예수님의 세례 후에 등장하는 과정은 40일간 광야에 나가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유혹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믿음의 기록인 성서는 세 가지 유혹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것은 마태오 복음서 4,1-11 (또는 루가 4,1-13)에 나옵니다. 그것은 인간의 배고픔에 대한 유혹, 남 앞에서 자랑하고픈 명예에 대한 유혹,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는 권력에 대한 유혹을 제시합니다.
68.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40일간 단식하면서 굶고 온 사람에게 먹을 것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유혹일 수 있습니다.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이기는 합니다만, 장발쟝은 빵 한 개 때문에 19년의 옥살이를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받을 수 있는 유혹이라는 데는 큰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장발쟝은 큰 유혹에 빠진 다음에 그렇게 인간적인 고생을 했지만, 예수님은 멋있게 그 유혹을 물리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는 말을 그 응답으로 제시합니다. 유혹자로 등장하는 악마는 그 말을 듣고서 자기의 유혹을 거둡니다. 우리가 유혹을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서 우리가 맺을 수 있는 삶의 열매는 달라집니다. 신앙인으로서 받는 유혹도 여기에 비길 수 있습니다. 반드시 눈에 보이는 빵으로만 비교하기보다는 다른 것으로도 충분히 바꿀 수 있는 말이 될 것입니다.
69. 성전의 한 꼭대기, 한 귀퉁이에 예수님을 세워놓고 한다는 소리,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이 두 번째의 유혹은 남 앞에서 자랑하고 싶은 명예에 대한 유혹입니다. 남 앞에서 자랑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 이 유혹입니다. 첫 번째 유혹에서 성서의 말씀으로 응답하는 예수를 보고, 두 번째는 성서의 말씀으로 유혹을 던집니다.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너를 시중들게 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하지 않았소. 그러니 뛰어내려서 하느님이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시는가 시험해 보자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고 뭔가 남다른 것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것이 인간이 가진 생각들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높이거나 뛰어나게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비참하다는 것 이외에 아무 것도 확인시켜 줄 것이 없다는 것이 이 유혹에 대한 본질입니다.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것이 인간이지만, 우리가 제대로 판단하기만 하면 그런 유혹을 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유혹에 대하여 예수님은 이렇게 응답하십니다.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면서 하느님을 떠보는 태도는 용서를 하지 못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70. 두 번째 유혹에서 한방 먹은 유혹자는 세 번째 마지막 유혹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해도 쉽지 않고 저렇게 해도 쉽지 않으니 한번 해 보자는 태도가 앞섰을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당신이 내 앞에 절하면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화려한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저는 다 읽지 못했지만) 자기 영혼을 악마에게 판 이가 ‘파우스트’인가요? 그 다음 이야기는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이야기 중 한가지이니 그런 가상적인 것도 만들긴 했겠지만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세 번째의 유혹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도 갖고 싶어하는 권력에 대한 유혹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까짓 꺼 눈 딱 감고 한번만 절하면 되지. 그러면 온 세상의 것이 모두 다 내 것인데..... 보통이라면, 이렇게 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있고, 그래서는 안될 일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혹자에게 마지막으로 호통을 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서에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는 말이 있다는 소리로 말입니다. (이상 유혹에 대한 것은 마태오 복음서를 중심으로 한 것임)
그러자 유혹자는 다음기회를 노리면서 예수를 떠나갔다(루가 4,13)고 기록합니다. 한번은 실패했지만, 나중에 다시 한판 붙으면 패배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입니다.
예수의 사명: 루가 4,16이하
71. 이 과정을 겪고 난 다음, 예수 마음이 어땠을까?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겠다고 파견되어 인간 세상에 왔는데, 시초부터 이러한 일을 겪었으니 그의 앞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세상에서 통하는 논리라는 것이겠구나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습니다.
유혹의 과정을 겪고 난 다음, 예수는 전도를 시작합니다. 그 전도는 갈릴래아에서 시작합니다.(루가 4,14-15). 훗날 다시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갈릴래아는 이방인의 지역이었습니다. 이방인의 지역이란, 온전하게 하느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이라고 알아들으시면 될 것입니다. 삶의 기준을 하느님보다는 인간적인 것들에 두고, 보다 현실적인 기준에 따라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에서부터 선포의 시간을 잡으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애초 복음의 선포를 기준으로 보면, 이방인의 지역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삶의 폭이 더 커질 것입니다.
72.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치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가 4,16-18) 이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당신 사명에 대한 요약문 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의 한가지입니다. 나는 이러한 정신으로 앞으로 행동하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73. 이런 예수님은 무슨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하셨는가? 그 주제를 말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주제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룩하는 문제에 대한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가장 중요한 것이기에 그의 선포 제 1성(第一聲)이 바로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였습니다. 이 세상에 이러한 모습을 세우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체적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알아들어야 하는가? 그 가르침들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음을 확신케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여러 가지를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것들이 바로 예수의 설교의 내용이고, 기적이며 행적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유지해나가는 것이 당신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예수의 설교, 기적, 행적 그리고 교회: 98-99면
74. 1998년 5월 7일 신구약 합본 작은 성서를 나누어주고, 장과 절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한 다음 몇 구절을 찾아서 함께 읽는 연습을 하다. 그리고 아래의 교리 내용을 계속 진행함.
75. 이 세상에 오신 예수가 이 땅에 선포한 것은 무엇일까?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우리는 말을 하고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자리에서 성서가 언제 쓰여졌는지 연대를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성이 별로 없습니다만,) 신약성서에 나오는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쓰여진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을 선포합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음을 알리고 그 나라를 우리가 맞아들이기 위해서 뭔가 준비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회개(悔改)’라고 선언하십니다. 아직 설명하긴 이릅니다만, 예수님의 선포 사명은 우선 이렇게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것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첨부하면, 여러분이 이 자리에 와서 말씀을 듣는 곳은 교회의 한가지입니다. 자세히 분류하면 가톨릭의 신앙을 따르는 구의동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도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하고, 예수님의 사명을 전하고 있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교회는 왜 생겼는가를 물으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전파하기 위해서 인간이 만들어낸 구조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순수한 인간들만의 구조는 아니고, 이 교회 역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동을 하고 있기에 하느님은 이 교회를 통해서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알린다고 기억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루가 복음서 4,16-19에 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 다르게 나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해야 할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합니다. 함께 읽어보시죠. (루가복음 4,16-19까지 읽는다) 예수님 사명의 강조점은 복음서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복음서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살다가 수난, 죽음, 부활, 승천하신 뒤 빠르면 약 40년 후, 늦으면 70년 정도 늦게 글로 쓰여졌기에 시대가 흐르면서 당시 사회에 필요했던 하느님의 말씀을 예수님의 입을 빌어서 여기에 써넣은 것은 아니겠는가? 라는 게 성서 연구학자들의 결론입니다. 그러나 정확한 결론은 아무도 모릅니다.
76. 복음서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 강조점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성서를 ‘학문(學問)’으로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정해진 결론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두겠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고 듣는 내용이 학자들의 연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이야기하면 복음서 네 권은 각각 들려주고 싶은 대상이 달랐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랬기에 사용하는 언어라든가 말을 사용하는 습관이라든가 구성방식이 달랐다고 합니다.
77. 루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 사명의 관심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진다는 것, 묶이고 눈먼 사람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한다는 것. 억눌린 사람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라고 합니다. 이와 같은 사상을 본받아서 요즘 교회에서는 2000년을 앞두고 은총의 해, 희년(禧年)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 운동이 결실을 맺으려면 하느님의 뜻대로 사람이 변화되는 일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루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사명이라고 해서 하느님의 나라 선포와 그 나라가 우리 가운데서 이루어지기를 바라거나 노력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78. 가장 간단하게 쓰여진 복음서이면서 가장 먼저 쓰여진 복음서라고 이야기하는 마르코 복음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시켜 가겠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당신의 첫 선포를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으로 하신 다음에 제자들을 부릅니다. 그리고 악령 들린 사람을 고쳐주시고 나병환자, 중풍병자 등을 고칩니다. 또한 중간 중간에 모여든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당신의 말씀도 하십니다. 안식일(=토요일)에 대한 이야기, 하느님을 따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마르 3,20-30), 하느님의 말씀이 참으로 뿌리를 내리려면 어떤 자세로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마르 4,1-34)를 이야기하십니다. 이런 내용뿐만 아니라 다른 말씀과 기적들도 하십니다.
모르긴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기적을 보면서 요즘 우리가 사는 시대에는 이러한 일이 왜 일어나지 않을까 물어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응답은 들려오지 않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기적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을 했습니다만, 요즘 사람들은 그 일을 통해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머리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말하고자 하는 의미도 잃어버렸고 더 기적이라고 감탄할 만한 일도 보도되지 않는 실정입니다.
79. 뒤 이어서 드러나거나 실현되는 기적과 가르침의 종류는 다양합니다. 풍랑에 대한 기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굳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가 깨끗해진 여인의 치유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의 힘을 보여줍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마르 5,34)는 말씀도 하십니다. 이런 기적들은 한결같이 자연의 순리를 완전히 바꾸어 놓거나 뒤집는 것들은 아닙니다. 만일 이러한 뜻으로 우리가 기적이라는 낱말의 뜻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우리 의학계에서 쓰는 말로 ‘참 기적같이 나았다’고 하는 말을 우리는 듣습니다. 의사들조차도 정상적인 과정이라면 변화가 올 수 없는 일에 변화가 왔고 그것이 건강을 회복하는 차원이었을 때에 우리는 그런 말을 씁니다. 그러나 그 말을 천천히 생각하면, 의사들조차도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그렇게 변화되었는지 모르겠다’는 고백입니다. 그것이 기적의 말뜻이 되고 마는 것이죠. 그러므로 성서에 나오는 기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그러한 방법으로 알아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80. 예수님이 행했던 기적들에는 한결같은 목적과 의도가 있었습니다. 그 의도는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거나 하느님의 뜻을 인간이 수용하게 하거나 할 때에 그 목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도도 없는데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 아니 나는 오히려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것이 성서에 나오는 대로 일어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은 예수님의 행적에도 같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행적도 즉, 가르침과 그의 움직임도 한결같은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그런 움직임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자신의 생활에서 돌아서고 잘못된 마음이 있었다면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예수님의 이러한 의도를 세상의 사람들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81. 간단하게 예수님의 행적에 관한 것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길게 이야기하는 것도 한계는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한 사람에 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도 어렵지만, 신앙의 근거에 따라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살고 움직이신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의 말로 끝낸다는 일에는 분명 한계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분에 관한 기록을 우리가 세세하게 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서에 기록된 것, 그리고 옛날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던 전승에 관한 것이 전부입니다. 사정이 이렇게 어렵긴 해도 간단하게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 순서는 마르코 복음서의 순서를 따라가며 하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몇 가지의 가르침과 기적 외에도,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활동은 계속됩니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과 활동을 바라볼 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의 행동과 가르침은 그저 생각나는 대로 즉흥적으로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첫머리(1,14-15)에서 예수님이 선포했던 것처럼, 예수님의 관심사는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와 그 가르침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그 정신을 받아들여 살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느님과 당시 사회지도층들이 알아듣고 백성들을 상대로 해서 가르치고 있었던 하느님 대한 내용사이에는 묘한 긴장관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일반 사람들과 함께 하는 하느님을 이야기했던 데 비해서, 사회지도층의 인사들은 정치권력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그들이 전공하고 다루었던 법에 의한 하느님의 활동만을 생각하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행동에 관한 것이 누락된 이론에 의한 하느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하느님을 이야기해도 서로 방향이 달랐고, 그래서 충돌은 계속됩니다.
82. 시기심에 가득 찬 마음으로 예수님의 행위를 본 당시 사회지도자들은 예수님의 행위를 가리켜 ‘사탄의 행위’라고 규정합니다. 마르코복음서 3,20-30에 나오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세상에 어느 나라든지 갈라져 싸우면 제대로 설 수 없다(3,24)”는 말씀을 통해서 잘못된 시각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 말로 그들이 변혁되었다면 하느님의 나라는 곧 세워졌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렇지 않았습니다.
4장에 나오는 씨뿌리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확장’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처음에는 사회 지도층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작은 씨앗이 훗날에는 어떤 결과를 맺는지,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제대로 된 길을 말씀하시며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실제로, 약 2000년이 지난 지금에는 그리스챤 신자가 꽤 많습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다가 죽었겠지만, 가톨릭 신자만 해도 약 10억 가량, 개신교신자도 그와 비슷한 숫자만큼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면 당연하겠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 대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따르기보다는 사람은 재산에 묶여 사는 경향이 강합니다. 5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놓아기르던 2천 마리의 돼지 떼가 졸지에 죽어버린 다음에 당연히 예수를 향하여 자기의 고장에서 떠나 줄 것을 요청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넓히고 악의 세력을 축소시킨다는 작업의 내용은 좋은 일이었지만,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중요성과 사람들이 알아듣고자 하는 중요성과는 평행선을 달립니다. 그런 일을 통해서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시선은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을 비운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긴 하지만(5,33참조-하혈하던 여인), 단순히 기적만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으려고 하십니다. 완전히 마음을 닫고 살던 고향 나자렛 사람들에게는 기적은커녕 자신을 변호하는 말씀도 하지 않으려 하십니다. (6,1-6). 마음이 열려 있어야만 한가지 일을 해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거라는 소리가 된다는 뜻일 겁니다.
공생활 시작에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었던(1,9-11) 세례자 요한의 죽음(6,14-29)이 있은 뒤, 예수님은 몸을 피하면서도 당신을 찾아온 5천명 이상의 사람들에게 빵을 배불리 먹게 하는 기적을 행합니다. 이 결과로 요한 복음서에서는 예수를 왕으로 모시려고 했다고 적기도 합니다(6,15). 자신들의 육체적 필요를 해결해주는 인간으로서 특별한 기적을 할 줄 아는 왕으로 말입니다. 물론 예수는 정중히 거부하고 산으로 피신합니다. 사람은 먹는 것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고, 예수는 악마에게 받았던 첫 번째 유혹에 대한 응답을 여기서 한번 더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훗날 교회에서는 이 기적의 의미를 살려 최후만찬 이야기(14,12-26)와 함께 그리스도교 성사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중추(中樞)를 이루는 ‘성체(聖體)성사(聖事)’로 설명합니다.
결국 유다인이면서 자신들이 알고 있고 따르던 하느님을 알려주었건만 받아들이지 않은 유다인들을 뒤로하고, 예수님은 이방인 지역으로 활동의 장소를 옮깁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고치고(7,24이하), 데카폴리스에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치기도(7,31이하) 합니다. 그리고는 거기에서부터 다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며{예루살렘 고지 870미터정도} 하느님의 나라를 외곽에서부터 점차로 형성시킵니다.
이 밖에도 예수님이 하신 일의 요약은 더 많은 설명으로도 가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선은 재미 삼아서 성서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은 재미있게 해야합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머리 속에 많이 담기거든 그렇게 읽으신 내용들의 의미도 한번씩 기억해보시기 바랍니다.
83. 그 다음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는 부활후의 영광이 어떠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예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모습(9,2-8),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기적(악령 들린 아이에게서 악령을 쫓아냄)과 가르침(참으로 높아지려면....), 혼인에 대한 교회 입장의 원천이 된 이야기, 그리고 결국에는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영광스럽게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호산나<HOSANNA, 히브리말, 구원하소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미 받으소서.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가 온다. 만세, 높은 하늘에서도 호산나?(11,10), 그런 다음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던 성전에서 일어난 부패상에 대해 엄한 호통(11,15-19)을 칩니다. 그 행위는 훗날 예수의 육체적인 죽음에 한몫을 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12,1-12)를 통하여, 하느님의 선택만 믿는다고 달라질 역사는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에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결국 이러한 권위에 대한 도전은 죽음으로 결말을 유도하고 맙니다. 때를 느끼신 예수님은 최후만찬(14,12-26)으로 당신의 끝을 준비하고, 예루살렘 성의 동쪽 편 게쎄마니에서 밤중에 기도하다가 제자의 배반으로 잡히게 됩니다.
이런 예수의 죽음은 결국 신성(神性)모독(冒瀆)이라는 죄명으로 결론을 맺게 됩니다. 마르코 복음 14,61-64에 자세하게 나옵니다. 신성모독은 즉결심판형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에 의해서 훗날 붙여진 죄목의 형태는 INRI<예수, 나자렛, 왕, 유다인>입니다. 일개백성으로서 로마에 대항한 사람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자기민족의 왕이라고 사칭했다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84. 위 이야기 가운데 좀 더 강조할 것은 십자가와 수난, 그리고 죽음, 부활과 승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잠시 그것을 이야기하기 전에 예수님의 이러한 행적과 교회에 대한 관계를 반복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이 교회는 훗날 그분의 말씀을 따랐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교회가 세워진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효율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길에서 벗어날 때에 교회는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고 비판을 받고 개혁되어야 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눈에 쉽게 보이는, 벗어나는 방법은 교회의 움직임이 인간의 욕심으로 가득 찰 때를 말할 수 있습니다.
85. 다시 십자가와 수난, 죽음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그 슬픔의 크기는 죽는 사람보다는 이 세상에 남아있는 사람에게 더 크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왜 일까요? 죽는 사람은 자신의 할 일을 다하고 죽었다고 생각하는데 비해서 살아있는 사람은 그 사람을 통하여 할 수 있는 일이 더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가 사라져버리면 그가 자리했던 크기에 따라 공간이 클수록 빈 공간의 허전함이 더 크게 느껴지기에 그럴 것입니다.
86. 이 예수의 수난의 과정을 거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원인에 대하여 인간적인 입장에서는 어떻게 될까 묻고 대답하는 것이 ‘죽음의 원인’에 대한 신앙적인 접근 방법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보면서 왜 예수가 죽어야만 했을까?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현할 수 없었을까? 하느님이시라면서 그 전능(全能)의 힘으로 확 변화시켰으면 좋았을 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셨을까? 하며 쓸데없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곤혹스러워 합니다.
87. 인간적인 입장에서, 당시 사회의 입장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한 원인과 그 과정을 성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찾아보죠.
먼저, 예수는 신성(神性) 모독(冒瀆) 죄(罪)를 지은 사람으로 판단됩니다. 마르코 복음서 2,7에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느님을 모독하는가?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비판하는 율법학자들이 나옵니다. 이 율법학자들은 성서를 연구하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성서에 근거하여 알려주고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하느님을 모독했다고 알아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 죄는 당연히 사형을 당해야 할 죄였습니다.
안식일에 남의 손을 고쳐주고 나서 받는 대접도 나옵니다. 마르코 3,6에 보면,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서 예수를 없애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고 합니다. 안식일은 유대인들의 삶의 지주였습니다. 우리로 비유하면 헌법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 율법을 어긴 사람은 더 이상 유대인의 소리를 들을 자격이 없었고, 그런 사람은 죽어야 한다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3장의 부분은 예수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때입니다. 처음부터 험난한 길을 가는 예수가 한편으로는 불쌍해(?)보이기도 합니다.
예수는 미친 사람으로 분류되기도 합니다. 마르코 3,22이하에 보면 사람들(=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학자)의 시각이 나옵니다. 그리고 가족들조차도 그가 미쳤다는 소리 때문에 그를 찾으러 나서기도 합니다.
예수가 하는 일은 온통 스캔들 투성이 입니다. 재산에 대하여 엄청난 손해를 끼친 그를 향하여 ‘우리 동네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마르 5,17)’하기도 합니다. 물론 재산을 중요시하던 입장에서 보면, 이와 같은 사람들의 자세는 십분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88.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33년간을 살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살았던 기간을 그 누구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생애 기간을 33년이라고 말하는데는 요한복음에 따라서 그렇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나던 1년 주기 행사가 예수의 생애기간 동안 3번이 나오기에 그렇게 33년이라 이야기합니다만, 자세한 것은 역시 알 수 없습니다.
89. 이 예수는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애석하게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성서에 적혀진 것 뿐입니다. 예수는 자신의 생애동안 3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일명 ‘수난예고’라고 알려져 있는 부분들입니다. 마르코 복음서를 기준으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린다고 했으니, 함께 찾아보죠. 첫 번째는 성서의 79-80면, 8장 31-38에 나오고, 두 번째의 것은 82면 9장 30-32에 나옵니다. 세 번째는 85면 10장 32-34에 나옵니다.
이렇게 죽음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는 수난예고로 알려져 있는 부분은 사실상 부활예고라고 말하는 게 더 올바른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는 죽음의 종교가 아니고 수난만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활을 바라고 부활의 정신을 우리가 현재에 적용시켜 사는 방법을 찾아보고 그것을 적용하는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 번에 걸친 예고에서도 마지막에는 항상 ‘부활’에 대한 예고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이 항상 중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성서에서는 그 마지막에 강조점이 실려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90. 이렇게 예수님이 표현하시는 수난과 부활 예고를 기준으로 말씀드린다면, 예수는 죽음을 억지로 당한 것이 아니라, 애초의 하느님 계획대로, 인간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느님의 계획대로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올바를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이것은 신앙의 차원에서 정리하는 표현입니다. 인간의 생각이 들어간 차원에서는 그 대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91. 제자들마저도 예수를 유령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이었고, 제자들이 바라본 스승의 모습입니다. 마르코 복음서 6,49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갈릴리 호수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다가간 기적을 보인 다음에 제자들에게서 예수가 받은 평가입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제자들마저도 스승의 참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에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여 죽음의 길을 갑니다.(마르코 14,10-11; 14,44-46)
또한 당신의 수제자(首弟子)로 임명한 제자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씩이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부인합니다.(마르코 14,66-72) 이렇게 생각한다면, 인간적으로 볼 때 예수는 철저하게 실패한 생활을 했던 사람입니다. 영양가 없는 삶의 결실을 맺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에 보면, 예수와 같이 십자가에 달린 사람마저도 조롱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아니오? 당신도 살리고 우리도 살려보시오!”(루가 23,39--165면)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몇 개의 항목에 걸쳐서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92. 다음으로는 사회지도층의 인사들은 예수를 왜 죽음의 길로 몰았는지를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초대받은 당신 교재 21과에 보면, 그 몇 가지가 나옵니다.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반발, 유다인이 가졌던 신관(神觀)의 차이, 당시 사람들이 가졌던 메시아관(觀) 차이 때문으로 그 원인을 찾기도 있을 것입니다. (함께 읽어보고 연구하기)
93. 102면에 나오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내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신앙의 내용이 우선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랐던 사람들이 보기에, 그를 통하여 하느님이 일으키신 일들을 생각해보고 정리한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그렇게 잘 알고 예견하고 있었던 예수의 죽음 의미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신앙도 형성되는 것입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바를 우리가 아무리 자세히 뜯어봐도, 지금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신앙을 모두 해석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가톨릭 종교의 믿음의 근간은 성서(聖書)와 성전(聖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성서는 말 그대로 글로 쓰여진 ‘성서’에 대한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전통에 해당하는 것, 뛰어난 삶을 살았던 성현(聖賢)들이 정리한 것들을 가리켜서 ‘성전’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94.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겠습니다.
예수님이 정확하고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은 당신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우리는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는가? 그의 죽음에 대하여 하느님은 어떤 판단을 내리셨을까?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아무 것도 표현되지 않으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이 받아들이셨을 모습은 우리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입니다. 다시 살아남이죠. 인간의 손에 의해서 비참한 모습으로 저 세상으로 떠났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하느님이 그의 죽음에 대하여 판정승을 내리셨다고 신앙에서 해석하는 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금요일 오후 3시경에 돌아가셨고, 무덤에 안장되었다가, 토요일 안식일이 끝나고 몇몇 여인들이 무덤을 방문했을 때 예수님의 시신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무덤을 찾아간 여인들에게 나타난 젊은이는 “겁내지 말라, 너희는 십자가에 달리셨던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 예수는 다시 살아나셨고 여기에는 계시지 않다. 보라 여기가 예수의 시체를 모셨던 곳이다. 자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께서 전에 말씀하신 대로 그들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거기에서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전하여라”(16,6-7)는 말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은 신앙입니다. 눈으로 본 사람의 기록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육체의 눈으로 확인은 되지 않지만, 나 혼자 나 홀로 느낀 특별한 일 때문에 내 생활이 바뀌는 모습을 봅니다.
예수님을 따랐고 가까이 뵈었던 제자들의 경우가 그랬을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해서 삶의 변화를 이루게 되었고, 그들의 행동에는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로 훗날 기적도 하게됩니다. 이 기적은 그들이 흔히 가졌을 인간의 능력범위를 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얻게될 신앙인의 자세도 마찬가지입니다.
95. 여러분 앞에서 제가 이야기를 드립니다만, 제 이야기가 재미있고 여러분에게 피와 살이 되기 때문에 듣고 시간을 내시는 것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이 갖는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말씀을 저보다 더 잘하실 수 있고, 이 사회에 공헌하시는 일의 역량이 더 크신 분도 많겠지만 그분들도 지금 이 시간만큼은 제게 시간을 내주고 계시는 분들입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신앙이 우리에게 힘이라고 봅니다.
96.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드릴 것의 결론을 맺기 위해서는 부활후의 삶과 승천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3일만에(정확한 시간은, 금요일 오후 3시 이후-토요일(=안식일)-토요일 밤 자정을 넘어선 직후의 날까지, 계산상 3일. 최대시간은9시간+24시간=33시간에서 안식일 다음날 해뜰 때까지 39시간이내) 부활하신 다음, 40일간 제자들과 더 생활하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 이 기간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이 기간은 복음서 다음에 나오는 사도행전 1,3에 나옵니다. 40일만에 예수님은 아예 당신의 모습을 이 지상에서 감추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순절(50일째 되는 날)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내려옵니다.
성령 언급
97.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들 몸에 모두 있는 내장기관들로부터 시작해서, 정말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족 사이의 사랑이라든가, 친구사이의 우정이라든가, 이웃을 서로 연결시키는 또 다른 사랑들도 모두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우리 생활가운데서 없어서는 안될 것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우정이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며, 종교에서 쓰는 용어로 바꾸면 그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이라고 간단히 표현하는 것은 사실상 매우 중요하고 다양한 의미를 갖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긴 해도, 중요하다는 말을 쓸 때, 우리는 보이는 대상에 쓰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우정이라는 것과 사랑이라는 것을 설명하라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다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말로, 내용으로 설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설명하는 것들이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으면서 큰 역할을 하는 힘 가운데, 가톨릭 신앙에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부터 다루고자 하는 성령(聖靈)입니다.
98. 세상 어느 종교든지 중요하게 강조하지 않는 내용이 없겠습니다만, 가톨릭 교회에서 이 성령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중요하다고 해서 상대적이거나 절대적인 개념으로만 생각하지는 말 것을 먼저 부탁드립니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말로 표현하지 못할 내용이 더 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한번에 다 설명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훗날 여러 번의 교리를 통해서 신앙인의 삶을 통해서 강조될 것입니다.
성령에 대해서 말하는 순서를 대충 말씀드리겠습니다.
성령이란 누구이며 무엇을 가리키는지, 그 성령은 사람보기에 어떻게 나타나는지, 성령의 역할과 작용은 무엇인지, 짧게는 이야기할 수 있어도 교회에서 성령이 차지하는 역할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예수님의 생활 곳곳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제부터는 순서에 따라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령의 강림, 성령은 누구인가?
99.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드리는 첫 번째 과정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말씀부터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오시는 성령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 부분의 이야기는 신약에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서 예수님의 탄생과 부활 다음으로 커다란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이 인류의 구원을 이루는 출발점이 된 사건이었고, 부활은 하느님이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의인의 죽음으로 인정하시는 의미에서 예수의 죽음에 대하여 판정승(判定勝)을 내리신 사건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기억하고 우리의 생활가운데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일을 우리가 이루겠다는 자세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나, 신앙인들이 되고자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자세라 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중요성을 갖는 것이 성령의 강림이라는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의 강림이 이루어지던 때를 기준으로 본다면, 예수의 탄생과 부활은 단 한번으로 끝난 과거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기억하는 성령의 강림에 대한 것은 유일한 단 한번의 행위로 치부(置簿)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홀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을 매개체로 해서 하느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당신의 삶을 통해서 그 모습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삶의 본보기를 남기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한 번으로 끝난 일이고 우리는 새로운 그리스도가 돼야 할 본보기로 남는 것에 비교할 수 있지만, 성령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그러한 의무와 역할이 남아있고 새롭게 부여됩니다.
100. 성령이 사도들에게 내려온 것은 오순절에 내려오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있은 지 50일째 되는 날, 그날이 오순절(五旬節)이었습니다. 이 오순절은 단순한 날짜의 셈에 의한 절기라고 하기보다는 ‘유대인의 절기로 따지면, 농작물이었던 밀을 수확하고 난 후, 하느님께 봉헌하는 축제일’ ‘첫 번째 추수일’이었습니다 창세기 처음에 나오는 것처럼, 처음 태어나는 것과 처음 수확하는 것은 하느님의 것(출애굽기 13,2 = 야훼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모태를 열고 나온 맏아들은 모두 나에게 바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의 맏배도 나의 것이다”)이며, 이 수확물 가운데서 곡식을 예물로 바치는 축제일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흥겨워 덩실덩실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은 그런 축제일이었을 것입니다. 이 축제일이 신약시대에 와서는 성령의 강림이라는 하느님께서 친히 인간에게 복과 기쁨을 내려주시는 선물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전례력에는 부활 대축일부터 계산해서 여덟 번째 되는 주일(1998년의 경우, 5월 31일)입니다.
101. 이 성령이 내려오자 제자들의 삶의 태도가 바뀝니다. 스승 예수가 승천이라는 과정을 통하여 부활하신 다음 40일만에 그들을 떠난 뒤, 10일 후 성령이 내려오시자 그들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자리에 숨어있지 않고, 현실의 삶에만 만족하지 않고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그들 앞에 놓여진 현실이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복음을 전파합니다. 복음을 선포합니다. 외치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나서 사람들이 변화에 동참하라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술 취한 사람들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사도행전 2,13),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무 놀래서 별 말을 하지 못하고 지냅니다. 성령을 받아 이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간 일 때문에 사도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들에게 다가온 선물(?)은 박해와 투옥 그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초대 교회에 감정을 보였던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102. 이 성령은 어떤 모양으로 내려오셨는가?
여기 사도행전 2장에서는 ‘불 혀’모양으로 내려오셨다고 전합니다. 혀란 말을 하고자 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은 사람들로 등장하는 12명의 사도가 말로써 복음선포를 확실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이 성령이 사람들 앞에 보이는 방법은 성서에 몇 가지로 나옵니다. 마르코 복음 1,10에 보면, 예수님의 세례 때에 성령은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옵니다.
또한 창세기 1,1-2에 보면, 성령을 묘사하는 용어로 학자들이 일치된 견해를 보이는 내용이 나옵니다.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여기에 나오는 하느님의 기운은 말씀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는 힘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기운은 ‘바람, 영, 혼, 얼’이라는 낱말로도 번역이 될 수 있다고 적습니다.
103. 하느님의 기운인 이 성령은 어떤 일을 하셨는가? 하느님의 기운이라고 했으니 하느님의 일, 하느님이 이 세상에 하시고자 작정하신 일들을 하셨을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바로 등장하는 성령은 예수님을 광야로 곧바로 인도하죠.(마르코복음 1,12) 40일간의 외로운(?) 고행을 하도록 이끄시는 힘으로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는 힘으로 등장하는 모습이 바로 성령입니다.
마르코복음 3,20-30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악의 힘을 제어(制御)하고 그 악의 확산을 막는 힘으로도 등장합니다. 사람들 사이의 논쟁에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질시 속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행하고 가르침을 베푸는 것이 악령의 기수 ‘베엘제불’의 힘을 빌어서 한다는 오해를 받게되자 성령의 역할을 확실히 알아듣고 선언합니다. 한가지 덧붙여 강조하는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을 욕하지 말 것, 그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선언하십니다.
부활 승천 다음에 이어지는 성령의 강림 사건으로서 사도들은 복음전파의 기수가 되게끔 만듭니다.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복음전파에 뛰어듭니다. 대단한 열성이 함께 하던 모습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할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서 14장 이후에는 성령의 오셔서 하실 일들에 대하여 길게 설명합니다.
104. (요한복음 14장의 설명)
지난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읽어보시도록 권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성령에 대해서 길게 설명하는 부분이 이곳이라고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그것은 성서 내용의 길이에 따른 기준이라고 하기보다는 성령이라는 특별한 주제로 그 내용을 다루고 있다는 말의 설명이라고 할 것입니다.
14,1-14의 내용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신다는 것을 주제로 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데 비해서, 14,15-26의 말씀은 다른 형태요, 다른 모습인 성령의 강림으로써 드러나게 될 하느님의 모습을 이야기함으로써 돌아오는 내용을 주제로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들으려면 어쩔 수 없이 구별해서 알아들어야만 합니다. 창조주 하느님으로서 성부이신 분, 성자 예수그리스도로써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알려주신 분, 이 자리에서 말씀 드리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하느님이신 성령으로 나누어서 알아들을 수밖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알아들으려면 구별되는 것 같지만, 같은 하느님이시기에 예수님은 자신은 떠나가고 성령은 오시는 일을 말함에 있어서 마치 당신이 그 모습 그대로 오시는 것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이렇게 알아듣는 세 분의 역할을 신앙을 설명하는 신학에서는 삼위일체(三位一體)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것을 잠시 후에 말씀드리기는 하겠습니다만, 설명은 어렵습니다.
새로운 형태로 우리에게 오시는 이 ‘협조자<Counsellor> 성령’이 오셔서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머물 것이고, 제자들을 사랑하실 분입니다. 그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궁금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가르쳐 알게 해 주실 분(요한 14,26)이십니다. 또한 성령은 믿음을 강하게 해 주실 것(14,29)이라고 하십니다.
105. 사도행전 1,8에는 성령의 역할 한가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을 받게 될 사람들이 ‘예루살렘, 온 유다, 사마리아, 땅 끝에 이르기까지 증인이 되게 하는 역할’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4,31에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대담하게 전하게 됩니다.
106. 이 성령은 올바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서 자신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 8,9 이하에 보면, 성령을 이용하여 한 몫을 보려는 ‘시몬’이라는 이름의 마술사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행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고 나서 돈을 내고(8,18이하) 성령을 주는 힘을 사려고 합니다. 잘못된 행위라고 우리는 판단합니다. 훗날 신앙인이 되면 여러분들도 똑같은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능력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일이 그것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제물을 많이 바치면 인간의 욕심에 해당하는 선물을 더 많이 받을 수 있겠거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무상으로 내려옵니다. 선물이라는 것은 본래가 내가 무엇을 받겠거니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오는 기분 좋은 것입니다. 그렇게 다가온 선물은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좋은 결과를 냅니다. 특히 하느님의 성령은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신앙입니다.
107. 구체적으로 성령이 주시는 선물에 대한 이야기는 고린토 전서 12,8-11(신약성서 328면)과 갈라디아서간 5,22이하(365면)에 나옵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능력, 기적을 행하는 능력,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직책, 성령의 활동을 구별하는 능력, 이상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 그 이상한 언어를 해석하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溫柔), 절제>등으로 나타나는 선물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한 훗날 다루게 될 견진 성사에서는 이 성령을 통하여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을 말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다양하게 내리는 성령의 은사들은 누구 개인의 영광이나 영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 그 공동체의 선익(善益)을 위해서 오는 것(1고린토 12,7 = 성서 328면)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요즘 볼 수 있는 ‘성령의 은사 체험운동, 부흥회, 성령세미나’ 등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은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운동들이 어느 한 사람의 명성을 날리게 하거나, 단순한 기적만을 찾게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일이므로 반드시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08. 이렇게 성령이 내려오신 힘을 받은 사도들은 이제 더 이상 의기소침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찾아 그들은 자신들의 머물고 있던 자리를 박차고 나갑니다......
하지만 이렇게 달려나가는 사도들, 즉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향하여 다가오는 인간의 평가는 실망을 던져 주이게 충분한 것입니다. 그 중에 첫 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저 사람들 대낮부터 술에 취했군’(사도행전 2,13)하며 빈정대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란 참으로 묘한 동물 아닌 동물이 돼 놔서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파괴해야 직성이 풀리고 험담을 해야만 그 본성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것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109.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든 간에, 성령의 힘으로 교회는 유지되고 발전합니다.
술에 취한(?) 베드로의 설교로 인하여 첫 날에 3천명 가까운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됩니다(사도행전 2,41).
예수를 죽인 일에 대하여 마음 켕기고 있었던 의회의 사람들은 부활한 예수를 선포하는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아놓고 으르고 협박을 하며 자기들의 규정을 들어 ‘선교행위를 금지’(사도행전 4,7; 4,18)하지만, 그렇게 박해받는 일을 하느님을 전하기에 받는 특권으로 알아듣는 사도들(사도행전 5,41)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을 보면서, 율법교사 한 사람이 편리한 제안을 합니다. 가므리엘의 말(사도행전 5,35-39 = 230면)을 읽어보시면 아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서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훗날 닥칠지도 모를 재앙을 두려워하여 피하자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되시려고 이 예비자 교리를 듣는 여러분들에게 그런 일은 없으셔야 할 것입니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훗날 신앙인의 통과 의례인 세례(洗禮)예절을 마친 다음에도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인의 정신에 맞지 않는 말입니다.
110. 미사 때에도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기도를 합니다. 신자들의 헌금봉헌이 있고 신자들이 일어서고 감사송이라는 부분을 한 다음, 복사들이 종을 치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나서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감사기도 2양식)
제물에 대한 기도의 첫 머리에서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거룩함의 샘이시옵니다. 간구하오니 성령의 힘으로 거룩하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하소서......’하며 기도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후 기도에서는)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라고 기도함으로써 성령의 힘을 통한 일치(一致)하게 하는 힘을 강조합니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111. 이제부터는 28과에 나오는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인간의 세계에는 사람의 지식과 과학의 수준으로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그것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설명이 안되긴 하지만 그래도 그 대상은 굳건하게 존재합니다. 이제부터 짧게나마 말씀드릴 삼위일체에 대한 것도 그 범위에 속합니다. 설명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수준에서 먼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을 본보기를 들어볼까요?>
112.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경우를 먼저 본보기로 들지요. 혼인을 하고 남자와 여자가 첫 날밤을 잘 지내고 나면--물론 때를 잘 만나야 하겠지만-- 자녀가 생깁니다. 그저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과학에서는 설명을 합니다. 난자와 정자가 합쳐진 다음 세포분열이 생기고 사람으로 발전하는 거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왜 난자와 정자는 자석과 쇠의 관계처럼 서로 끌어당기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합쳐진 다음에는 왜 분열을 하고 우리 몸에서 볼 수 있는 그러한 기관으로 발전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물론 DNA, RNA 어쩌구 하면서 그것들이 가진 특성이라고 설명을 할 수 있기는 해도, 그렇게 설명한다고 해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의문들이나 궁금증이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 지나 봄이 되면 나무들에 물이 오르고 꽃을 먼저 피우는 녀석들도 있고 잎사귀를 먼저 내는 녀석들도 있습니다. 일관성이 없죠. 그러나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인간이 보기에 그런 것뿐이고 자체로는 충분히 설명이 가능할 것입니다. 물질 내에서 이루어지는 삼투압현상이다 뭐다라고 우리가 설명은 해도, 그 역시 그런 설명만으로 우리가 갖는 의문이나 궁금증들이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루를 움직이고 밤이 되면 잠을 잡니다. 온통 사람들이 다 똑같은 시간을 잠으로 소비하는 것은 아니지만 잠이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우리가 지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이것 역시 세포가 쉬기 위한 수단이고 뇌에서 그렇게 명령하니 움직이는 것이라고는 해도 그것으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궁금증이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우리가 이 세상을 못사는 것은 아닙니다. 궁금하긴 하지만, 그냥 내버려두어도 우리가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은 없습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에 대한 것을 이렇게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신비스럽게 남겨놓아야 할 것은 그래도 있을 거라고 봅니다.
113. 삼위일체(三位一體)를 몇 마디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성령을 이야기할 때도 말씀을 드리기는 했겠습니다만, 우리가 따로 따로 알아듣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사실은 따로 따로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고 한 분이시다’라는 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신학적인 용어로 더 어렵게 설명하면, 성부라는 위격(位格)과 성자라는 위격, 그리고 성령이라는 위격이 따로 따로 활동하지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분들은 셋이 아닌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신학의 이 부분에 이르면, 설명이 본래의 주제보다 더 알아듣기 힘들어집니다.
인간과 자연 세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알아듣지 못하는 내용들이 있다고 하는 것처럼, 이 삼위일체 부분은 계시(啓示)라 해서 하느님의 고유영역이라고 규정합니다. 하느님에 의해서 창조된 인간은 그 하느님의 속성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므로 하느님이 알려주시는 한계 안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28과의 내용을 읽어봐도 애매모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114. 아우구스티노 성인이라는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모니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었습니다. 이 아들이 당시에는 매우 똑똑한 인물이었습니다. 법학, 철학, 수사학, 논리학 등 다방면에서 뛰어난 이름을 날린 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의 바램과는 달리 아들은 방탕의 길에 첨단을 달리던 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32살 경에 이르러 회심(悔心)의 길을 갑니다. 그렇게 바뀐 생활을 지낸 다음 그는 주교가 됩니다. 그렇게 뛰어난 지혜와 학식으로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칩니다.
그분의 삶의 체험가운데 삼위일체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심의 길을 간 다음,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듣기 위해서 바닷가를 거닐며 고민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신비라는 판단을 했으면서도 그는 알아듣기 원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에게 바닷가 물이 치는 곳에 소년이 앉아서 모래구멍을 파놓고 조개 껍데기로 물을 퍼 넣고 있었습니다. 얘야,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냐? 아저씨는 지금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들으려고 그렇게 고민하고 계시는데, 제가 이 조개 껍데기로 이 구멍에 바닷물을 다 퍼 옮겨 담을 수는 있어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알아듣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신비가 그렇게 어려운 것인가를 다시 물어보려고 소년을 쳐다본 순간 그는 눈앞에서 사라져 버렸고, 그 이후로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탐구하기를 중지했다는 고백 아닌 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개인이 체험한 일화이기는 합니다만, 사람의 세계에는 그 머리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115. 올해<1998년>의 경우에는 다음 주일 (6월 7일)이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이날 우리는 독서와 복음의 내용을 통해서 몇 마디 말씀을 듣습니다.
첫 번째 독서 잠언을 통해서는 하느님의 지혜<=구약성서에서 사용하는 성령의 칭호, 초대받은 당신 131면>가 고백하는 하느님 찬미를 듣습니다. 세상 시초에 만들어진 그 힘은 하느님의 창조 때도 함께 있었다는 신앙고백의 한가지입니다. 단순히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활동의 조수역할을 수행했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독서, 로마서의 말씀을 통해서는 하느님 성령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느끼는 여러 가지 기쁨의 원천은 성령이 우리에게 작용해서 생기는 결과라고 알려줍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하고 이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는데, 이런 과정의 원천은 성령이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주신 결과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 복음을 통해서는 예수님과 살면서 들었던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느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재확인시켜 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언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의 역할은 모든 것을 완성시켜 준다는 교회의 정신을 그대로 고백하고 있는 것이 돌아오는 주일에 듣게 될 삼위일체의 역할에 대한 것입니다.
성총(聖寵)을 얻는 방법(方法) 편
116. 지난 시간까지는 교회의 구성요체를 이루는 믿어야 할 교리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반복이 되긴 합니다만, 제목이라도 다시 말씀드리면, 지난 시간까지 말씀드린 예비자 교리의 내용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서 말씀드렸다는 것입니다. 그 구체적인 배경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도 다루었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깨달은 것을 적고 동시에 자신들 삶을 돌이켜 본 반성의 기록 성서를 여러분들이 가깝게 대하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사용도 했습니다.
믿을 교리에 대한 내용을 다 말씀드린 다음에, 노파심에서 말씀을 드릴 한가지가 있습니다. 이렇게 교리를 통해서 강조하는 교리의 내용을 다 기억하고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삶의 실천이 따르지 않는다면, 앞서 한 행동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배우고 익히는 것은 삶으로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삶으로 드러내는 일에 대해서 다룰 것이 오늘 이후의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커다란 제목으로는 <성총을 얻는 방법>이라고 해 두겠습니다.
교회
117. 사람은 홀로 살지 못합니다. 태어나는 것은 혼자이고,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고생하고 앓는 것도 혼자이며, 결국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혼자이긴 하지만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합니다. 이것은 몸의 움직임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로 살아가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공동체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습니다.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공동체는 ‘가정’일 것이고, 자라면서 겪는 과정의 하나로 ‘학교’도 있을 것입니다. 회사라는 단체도 말할 수 있을 것이고, 국가도 아마 공동체의 하나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구성은 개인 선택의 여지(餘地)없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고, 개인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시작한 공동체에 대하여 내가 마음 닿는 대로 들어갈 수 도 탈퇴할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묘하게도 신앙이라는 공동체는 한번 들어가겠다고 다짐하면, 생각처럼 쉽게 나오거나 깰 수 있거나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없는 특성을 지닙니다. 이것은 사람이 가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이익의 차원이 아니기에 더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여러분들이 교회공동체에 들어오겠다고 다짐을 하고 지금 이 시간을 내는 것이니, 여러분의 자세가 일반 공동체와는 달라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들어오기도 어려운 공동체가 신앙의 공동체이지만 탈퇴하기도 어렵다는 특성을 지닌 것이 이 공동체의 특성가운데 한가지입니다. 사람이 주체가 되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단계 위인 하느님의 힘, 영(靈)의 힘으로 가능한 공동체이기에 그렇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교회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야기할 순서는 교회란 무엇인지, 그 교회라는 공동체의 특성은 무엇인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공동체 역사의 삶의 과정 즉 역사는 어떠했는지를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교회의 어머니요 모범으로서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또한 마리아를 통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기도<=묵주의 기도>도 알려드리겠습니다.
교회란 무엇인가?
118. 교회라고 하는 말의 의미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교회라는 말은 애초에 한국말이 아니고, 이 말은 희랍어 <에클레시아>라고 하는 말의 번역어입니다. 희랍어 <에클레시아>라는 말의 의미는, “집회, 모임, 교회”라는 뜻을 갖는 말입니다. 좀 더 자세하게 이야기하면, ‘하느님께서 친히 모으신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회’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1고린토 1,2<=311면>에서 이 말을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 이룬 하느님의 거룩한 사람들<백성>’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며,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요,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골로사이 1,24;1,18)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교회는 언제 형성되었는가?
이런 의미를 갖는 교회의 시작은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서부터 유래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고 에집트에서 탈출한 백성들, 광야생활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그렇게나 당신의 뜻으로 이끌어들이려고 노력했고, 그 뜻을 따랐던 사람들, 모세와 여호수아의 인도를 통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했던 사람들이 그 원형(原形)입니다. 그러나 애초에 원형을 이루었던 사람들 모두가 같은 길을 걸어간 것은 아닙니다. 인도자의 뜻을 실천한 사람들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우리의 이야기 대상에서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은 빼도록 하겠습니다.
이러한 시초의 역사를 갖는 교회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성령강림이후에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어떤 삶의 모습을 보였는지는 제가 여러분들에게 지난 시간들을 통해서 말씀드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은 다음, 머물러 있던 2층 방에서 나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나옵니다. 이 복음 전파는 교회라는 단체가 보여준 드러난 일에 해당합니다. 죽음에 대한 위협도 비방도 두려워하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던 삶의 원천이 성령이긴 했지만 그렇게 움직이는 일의 결과로서 교회는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처음으로 모인 사람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동참(사도행전 2,42)합니다. 또한 물건들을 팔아서 모두 가져다 놓고 필요한 만큼 가져다 쓰는 무리(사도행전 2,45)를 이룹니다.
교회에 해당하는 직접적인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이러한 초대교회의 움직임은 훗날 ‘사회주의의 원형’이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모습을 가리켜 ‘공생적 사회주의’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사회주의라는 말이 시대가 흘러서 색깔있는 용어가 돼버리긴 했습니다만, 사실은 전혀 색깔없는 권장할 만한 삶의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는 ‘키부츠’라는 것을 새롭게 드러나기도 하고, 요즘 우리 나라에도 그런 공동체가 생긴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공동체를 이루고 필요한 것은 나누어 쓰는......아파트단지에 물건 배달해주고.... 새로운 신앙촌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교회의 정의 - 니체아 신경에 나오는
119.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
이렇게 표현하는 정의(正義)는 니체아(325년) 콘스탄티노플(385년) 신경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 - 교회는 하나뿐이다.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모시고 한 신앙을 고백하며, 한 세례로 태어나 한 몸을 이루고 한 분의 성령에 의하여 생명을 받는다. 교회가 추구하는 것은 성령의 강림을 통하여도 표현되었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던 곳에 사도들은 하느님의 업적을 전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각기 자신들의 말로 알아듣습니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사건을 연상시키는 표현입니다.
<거룩> - 이 교회는 거룩하신 하느님이 창시자라는 소리이다. 이 거룩하다는 말은 구약성서 이사야 예언서 6장에 나오는 말로, 천사들이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고백할 때 나오는 말입니다.
<보편> - 그리고 전 세계 어디서나 항상 같은 말과 의미로서 하느님께 찬미의 제사인 미사를 봉헌해왔는데, 1968년 바티칸 2차 공의회가 끝난 다음, 각 국가의 모국어로 미사를 봉헌하게 되어 지금은 그 통일성이 사라진 듯 보이기는 합니다만 그렇게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사도로...> - 가톨릭교회에서 믿고 따르는 교회는, 예수님은 교회를 이루는 최초 원인제공자였고, 그 후계자들인 12명의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인 주교를 통하여 유일한 것으로 맥을 이어내려 온다고 가르칩니다.
세계 교회의 역사
120. 이런 네 가지 특징을 갖는 교회는 자신의 역할을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펼치기 시작합니다.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신약성서의 나머지 내용들은 이렇게 형성되고 발전하는 교회 공동체의 변화모습을 적고 있습니다. 발전하는 모습, 그 공동체들 사이에서 생긴 문제와 그 문제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사도들의 가르침, 예수님이 남기신 말씀(마태오 10,23)을 따라서 여기서 박해하면 저기로 피하고 거기서도 박해하면 또 다른 곳으로 펼쳐져 나가는 교회를 볼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 그렇게 해서 세계의 여러 곳으로 알려지게 된 교회와 그 역사를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121. 세계 교회의 시작
교회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을 수 차례 언급하면서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3일만의 부활, 40일만의 승천, 10일만의 성신강림에 이어서 제자들의 모습이 완전히 바뀐 모습을 보였다고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때가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가 되기 위한 싹은 오래 전부터 품고 있었겠지만 말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알려주신 그대로, 스승 예수에게서 배운 그대로 실천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하는 말에 가장 가까웠다고 해서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초대교회(初代敎會)’라고 부릅니다. 물론 그들의 뛰어난 생활상을 가리켜서 ‘초대교회 신자들의 생활’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생활모습은 사도행전 2-5장에 나와 있습니다. 물론 잘못 나가는 모습을 보인 사람들도 있긴 합니다만 어쨌든 우리는 당시의 역사를 가리켜서 모두가 본받아야 할 초대교회의 역사라고 합니다. 가장 하느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정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기신 말씀과 그 정신에 가장 가까이 움직여 나간 공동체라는 말이 될 것입니다.
122. 교회의 역사기록
스승 예수를 가장 가까이 뵈었던 ‘그들’은 삶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기뻤던 삶의 모습이고, 환희와 즐거움의 모습이었고 어떤 역경이라고 하더라도 과감히 떨쳐 버리고 다시 움직이겠다고 하는 그런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임[살해=殺害]의 위협 앞에서도 굳건했던 그들의 모습이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지더라도 자신의 생활은 떳떳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대한 기록을 남깁니다. 바로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성서의 내용과 말씀들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역사는 시작됩니다.
123. 역사의 전개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앙공동체, 즉 그리스도교회의 처음 출발지는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교회 초창기의 역사에 이 지역은 지금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 ‘로마’라는 국가의 정치적인 식민지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문화지배는 지금의 그리이스 지방에 있던 국가 그리이스였습니다. 그랬기에 성서는 그리스어로 쓰여져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구별에 따르면, 성서가 담고 있는 역사의 가장 늦은 배경은 길어야 기원 후 110년경으로 잡습니다. 즉,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약 70년 후까지 기간이지요. 그 이상의 역사적인 상황이나 모습은 성서에서 우리가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성서 기록 이후의 일을 알아보는 것이 오늘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릴 교회의 역사가 되는 거구요.
124. 초창기의 역사
성서가 담고 있는 시기 이후의 역사는 여러 가지 면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습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좀체 없습니다만, 초창기에는 신앙을 갖는 것도 지금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약이 많았다는 소리가 되겠지요.
로마라는 국가와 그 정치이념을 생각해 보면, 종교는 대단히 크고 중요한 일에 속했던 시대였습니다. 특히 이 국가 로마는 자기들의 민족신, 조국 신들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엄격하게 관리하였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 조국 신들에는 황제에 대한 숭배가 있었습니다. 따르면 살지만 거부한다면 죽음의 길로 가야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따라서 이 로마라는 국가에서 볼때, 그리스도교인들은 국가적인 종교, 예배를 멀리하는 무신론자들의 집단이었고 모임이었습니다. 그리고 ‘성찬제(聖餐際)’라는 것을 통해서 인육(人肉)을 먹는 집단으로 모함을 받았습니다. 또한 이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을 따르지 않기에 질병들(=페스트, 홍수, 기근, 이민족의 침입)의 원인이 된다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온 것은 박해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렇게 해서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박해들은 상당수 로마의 정치지도자였던 황제들에 의해서 시행되었습니다.
125. 기원 후 112년경에는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가 칙령을 반포, 박해하는 기준을 만듭니다. “크리스챤들을 일부러 색출할 필요는 없지만, 만일 그리스챤임이 드러나고 또 로마의 신들에게 희생 드리기를 공식적으로 거부하는 사람들은 벌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칙령은 훗날 로마 관리들이 그리스챤들을 다루는 한가지 기준이 됩니다.
126. 밀라노 칙령과 교회의 로마종교(國家宗敎)화(化)
로마 황제중 한사람으로서 ‘콘스탄티누스 대제’라고 있습니다. 일설(一說)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그는 황제권 다툼으로 인한 ‘막센티우스=막시미누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합니다. 그렇게 승리하기 전 그는 꿈에서 십자가<†>와 그 표시를 앞세운 사람들의 무리를 보았고, 길(吉)한 징조라 생각하여 그는 자기의 병사들에게 십자가 깃발을 앞세우고 전쟁에 임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자 ‘그리스도교 박해’를 끝내고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합니다. 이 밀라노 칙령(313년 6월) 이후에 그리스도교는 지하(地下)교회에서 지상의 교회로 모습이 바뀌게 됩니다. 박해시대에 몰수되었던 교회의 재산이 반환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속박하던 모든 법률이 폐지되었습니다.
127. 기원 후 449년에 열린 에페소 강도회의 :
이 회의는 콘스탄티노플의 수도원장인 에우띠체스가 주장한 그리스도의 단성론 <그리스도는 천주성(天主性)만 가졌지 인성(人性)은 없다는 주장>을 인정한 회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교황 레오 1 세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플라비아누스에게 교서를 보내어 정통 가톨릭 교리수호를 역설하고 에우띠체스의 이단을 반대한다고 천명했으나,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를 움직인 에우띠체스 일파가 에페소 회의를 열게 한 뒤, 주교들을 위협하여 지시 서명을 받아냈고, 플라비아누스 총주교를 살해하였다.... 이것이 강도회의의 전말이다...
451년 : 교황 레오 1세에 의하여 칼체돈 공의회가 열림... 콘스탄티노블 맞은 편에 위치한 칼체돈에서 에페소 강도 회의를 유발시킨 에우띠체스의 그리스도 단성론을 단죄함....
<신자들이 미사 중에 받아 모시는 눈으로 보이는 성체는 천주성과 기묘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따르는 신앙의 내용입니다. 이것을 굳이 표현하자면, 천주성(天主性)-인성(人性)의 양성론(兩性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현재 가톨릭 교회는 양성론을 수용한다. .>
128. 동로마 제국의 성화상(聖畵象) 파괴논쟁
726년 : 레오 3세 황제가 성화상과 유해 공경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함.. 이것이 소위 성화상 파괴주의 인데, 843년까지 동방에서 큰 혼란을 야기시킴....
731년 : 그레고리오 3세는 로마 시노드를 개최하여 성화상 파괴주의를 단죄하고, 성화상 공경은 가톨릭 전승과도 일치함을 명백히 선언함..
787년 : 제 2차 니체아 공의회 개최........주로 성화상 파괴주의를 단죄함.......
129. 동․서방 교회의 분열(分裂) - 1054년
밀라노 칙령(313년)이후에 황제는 로마를 교황에게 맡기고<330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의 수도를 천도-시오노 나나미, 콘스탄티노플 함락 83면> 자신의 권력 중심지를 동쪽의 지역인 비잔틴(=콘스탄티노플)으로 옮겨갑니다. 그리하여 후일에는 상업적인 중심지였던 도시들을 중심으로 해서 5개의 커다란 도시가 생겨납니다.(로마, 비잔틴=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 5세기경.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네스토리우스, 그리스도안에 신성과 인성이 함께 있음을 주장, 431년 에페소공의회에서 단죄. // 네스토리우스에 반대하는 에우티케스는 인성이 신성에 흡수돼 버리는 단성론주장, 451년 칼체돈 공의회에서 단죄.
한편,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쪽의 교회는 당시의 시대상황과 사상의 발전에 따라 신앙에 대한 학문적인 것이 발전해 나가지만, 다른 네 개의 도시를 중심으로 한 동쪽의 교회는 과거의 모습 그대로 남습니다. 또한 주된 언어였던 라틴어와 그리스어의 차이, 관습과 제도의 차이, 그리고 비잔틴 총주교들이 로마 교황과의 동등권을 주장하는 야심 때문에 교회사이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857년 포시우스 총주교 때엔 한때(864-868년) 로마와 분리되었다가 다시 화해하기도 하였으나, 미카엘 체룰라리우스 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내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라틴교회가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한다, 사제의 독신제와 신경에 필리오꿰를 삽입하였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하여 레오 9세 교황은 특사를 파견 담판을 시도하였으나 결렬되고, 사절이었던 훔베르트 추기경은 체룰라리우스에게 파문선고(현재는 그의 행위가 월권<越權>이라는 견해가 지배적)하고, 체룰라리우스는 로마교황을 파문(당시는 공석이었지만)함으로써 동․서방 교회는 분열되었다(1054년). 그 뒤 루마니아, 조지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러시아의 정교회들이 로마 교회에서 속속 이탈하였다. 이것이 1961년쯤에 와서 상호파문을 취소함.
130. 십자군 전쟁(?)
분열된 동․서방 교회는 더 큰 대립을 하게된다. 분열한 후 동로마 제국은 점점 약해지고 증대해 오던 이슬람교도가 제국의 아시아지역, 북아프리카를 석권하여 성지를 점령하고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다. 이에 서방교회는 7차례(1079년-1265년)에 걸친 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킨다. 이 운동의 목적은 성지회복 및 크리스챤들이 성지에서 자유로운 순례였다. 제 1회 십자군은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5년에 클레르몽 회의에서 제안했고 원정군의 옷에 †자 표시를 했으므로 십자군이라고 불렸다. 몇 번에 걸친 원정에 따라 한때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라틴 제국을 건설(1204-1261)하고, 라틴교회 총주교좌를 설치하고 예루살렘 성지를 크리스챤들이 자유롭게 순례하는 권한을 얻기도 하였다.
131.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분열(1517년 이후)
천주교와 개신교의 분열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차례입니다. 종교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누어지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한 분은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마르틴 루터(수사 신부)입니다.
그는 1483년에 튀빙겐 지역의 작센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1484년 만스펠트의 광산지역으로 옮겨가 살게되면서 동광기업(광산)의 경영주가 되었고 아들의 입신출세를 위해 교육시킬 계획을 세운다. 아버지의 계획에 따라 아들은 라틴어, 수사학, 윤리학과 신심과 조용한 기도 생활에 대해 배운다. 그는 15세에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하여 강의를 들으면서도 악기연주에 재능을 보였고, 철학자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진지해 진다. 이후 1505년에 부친의 뜻에 따라 같은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을 하지만, 2개월 후에는 수도생활을 하기 위해 법학과를 포기한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의 수사가 된다. 1506년 9월에는 정식서원을 하고 수도자가 되었고, 1507년 4월에는 사제서품을 받고 본격적인 신학을 연구한다. 1513년에는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성서를 강의한다. 1515년에는 비텐베르그 본당의 설교가가 되어 강론대에서 교회개혁의 필요성을 주창한다. 개인의 구원에 관심이 많았던 루터는 영신적 번뇌와 그 탈출과정을 통해서 ‘의인은 신앙에 산다’는 신앙에 의한 의화(義化)’를 주창하면서 교회, 성사, 사제직의 필요성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이때 교황 레오 10세는 전임교황이 베드로 대성전의 재건을 위해서 반포한 대사(大赦)를 다시 선포하고 비용을 걷기 위한 방법으로 대사 설교가를 임명한다. 이 설교가(說敎家)가 된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한 채 대사부를 면죄부(免罪符)로 착각하여 남용하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517년 10월 31일 교회관습대로 교구장과 대주교에게 대사남용에 항의하는 95개항의 신학명제를 작성, 동봉하여 보낸다. 약 2 주 후, 이 명제가 출판업자의 손에 넘어가 인쇄되고 인문주의자들과 교회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들의 환영을 받는다. 마르틴 루터는 이 반박 명제를 비덴베르크 성당에 붙이고 95개 조항을 게시하여 개혁 주도의 신호를 보인다.
1518년 10월 카예파노 추기경이 심문관으로 독일의 아우스부르크에 파견되어 루터의 가르침, 즉, 대사, 신앙과 성사은총의 관계, 공로의 의미에 대한 견해를 경청하고 그에게 무조건 이단적인 교리를 취소하도록 명령하였다. 결국 1520년 2월 로마에서는 이 교리에 대한 내용이 조사되고 루터의 단죄를 선언한다. 1545-1563년 사이에 열렸던 트리덴틴 공의회에서 다른 교리를 말하는 프로테스탄트를 인정하지 않기에 이른다.
132. 영국 성공회
영국교회를 위시해서 영국교회의 대표 주교인 켄터베리 대주교 관구와 통공관계에 있는 여러 교회를 성공회라 부른다.
성공회는 1533년 헨리 8세는 아라곤의 가타리나와 이혼하고, 앤 블린과 결혼하여 파문 당함.... 1534년에 그는 수장령을 발표하고, 수장령을 통하여 국왕이 영국교회의 으뜸이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시작된 성공회는 ‘개신교의 한 형태’입니다. 그렇지만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는 개신교이기도 합니다.
성공회는 혼인문제와 관련하여 로마의 교황과 대립했던 ‘헨리 8세’때를 시작으로 해서,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 때에는 국가와 종교를 단일시 하려는 일 때문에 교황청으로부터 파문을 받습니다(1570년). 이때부터 로마교회와 분열된 것입니다.
이 성공회는 성경을 기본 신앙으로 따르고, 가톨릭에서 통용되는 사도신경과 니체아 신경을 믿으며, 주교 사제 부제의 성직제도를 보존하고, 세례성사와 성체성사를 그대로 보존한다. 하지만 1850년 이후 영국에 다시 가톨릭교회가 진출하여 1982년 현재 31개 교구, 국민의 9% 가량인 약 509만 명의 가톨릭신자가 있다.
133. 중세시대 이후의 간단한 세계 교회역사
1583년 : 마태오 리치가 중국에서 선교활동 시작...
1633년 : 갈릴레오가 이단 심문을 받음... 그는 1642년에 운명함........
1704년 : 청나라의 전례문제... 유교의 여러 사상과 관습을 그리스도교와 접목시키려는 선교사들의 행위, 특히 조상 숭배와 중국의 민간 신앙 문제의 적용이 큰 문제가 되어, 끌레멘스 11세가 이를 금지시킴...
1724년 : 청나라 크리스챤 박해가 시작됨....
1789년 : 프랑스 혁명이 시작됨.... 교회 재산의 국가귀속 등의 공포정치 시작... 교회가 수많은 박해를 받기 시작하고 1796년 나폴레옹의 교황청 침공으로 극도의 혼란상이 가중됨..........미국은 헌법 제 1차 개정 작업을 통하여 종교자유를 명기함..
1829년 : 영국 가톨릭이 종교 자유를 획득함으로써 헨리 8세 이전의 시민권을 회복함...
1869년 : 제 1차 바티칸 공의회... 비오 9세가 소집한 이 공의회는 약 800명의 고위 성직자가 참석하여 4회기 89회 회의를 함.... 교황 수위권, 무류성, 19세기의 주지주의, 유물론 등 내외의 위험에 대치함....
1967년 : 로마에서 세계 평신도 대회가 개최됨... 교황은 민족들의 발전을 촉구하는 "뽀뿔로룸 쁘로그레시오" 반포하고 사제 독신제도를 강화하는 "사체르도딸리스 챌리바뚜스" 반포하심...
1983년 : 교회법이 개정 선포됨...
한국 교회사
134. 교회창설의 배경, 천주교의 수용과 가성직제도
지리상의 발견과 서세동점(西勢東占)의 세계여행은 중국과 일본에까지 천주교가 전래되게 하였다. 이들 서양전래의 가톨릭은 당시의 문화와 함께 전래되었다. 북경을 방문하는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의 예수회선교사들을 통하여 서양문물을 얻고자 하였고, 처음에는 학문으로 필담(筆談)을 나누던 것이 계기가 되어 서양의 문물이 점차로 조선에 반입되기 시작하게 되었다.
최초라고 한다면 아담 샬이 소현세자를 통해서 조선에 전도하려고 함이었으나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불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서적들은 17세기초부터 서양의 학술서적들이 반입되기 시작. 마테오리치의 한문교리서 ‘천주실의’(天主實意)가 진리 찾던 소수의 실학자를 매료시킴. 처음에는 학문으로 연구함(천주학, 천학, 서학). 차츰 신앙으로 바뀜. 교리 연구하던 남인학자들이 받아들이고 환영하여 서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으로 등장. 사절단으로 북경을 오가면서 이승훈이 1784년 2월에 북경에서 불란서 선교사 그라몽 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 받고, 조선에 돌아와서 이벽과 권일신 등에게 세례 베품. 이승훈이 가져온 서적들을 읽고 연구한 다음에 복음전파 시작함.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의 해결점을 서학에서 찾고, 이제는 기도와 재계등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 1786년부터 지도급 신자들은 가성직제도 세워 북경과 유사한 체제 세우려함. 북경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옳지 않음을 알고 선교사 파견을 요청. 조선의 천주교 수용은 조선인 스스로에 의해 시작됨.
135. 한국 교회역사의 시작
처음으로 한국 땅에 천주교가 소개되었을 때에는 지금처럼 신앙이라기보다는 학문의 하나였습니다. 명분에 죽고 사는 ‘주자학’이라는 이론적인 학문을 떠나 흔히들 이야기하듯이 실사구시(實事求是-사실에 바탕을 두어 진리를 탐구하는 일)의 하나로 소개됩니다. 그런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들이 발견한 바에 따라서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발전합니다.
그런 뜻에서 한국교회의 전래는 자생적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학문의 하나로서는 당시 조선사회에서 냉대를 받던 몰락한 양반계층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었고, 학문의 하나로서 탐구하다보니 국가에서 정책적으로 삼은 것과 많이 차이가 나죠.
이들은 처음에 신앙이 아닌 학문의 하나로 출발했기에 지금은 천진암이라고 알려진,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에 있는 절[寺] ‘주어사’에서 모임을 갖고 시작합니다. 이때가 역사로는 1777년이라고 합니다.
이때부터 학문의 하나로 출발했던 것이기에 지금 이야기하기에는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라는 것에 따라서 지금의 ‘주교, 신부, 부제, 신학생’의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러다가 이승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북경의 성당으로 보내어 1784년에는 세례를 받게 합니다. 역사에서는 그때부터를 한국교회의 시작이라고 기억하고 지냅니다.
이 해를 기준으로 해서 1984년에는 교회역사 200주년 기념식도 여의도 광장에서 가진 적이 있었지요. 굳이 역사상에서 따진다면, 올해는 한국 천주교회 전래 1998년에는<--215주년-->쯤 될 것입니다.
136. 성직자 영입운동과 조선교구의 설정
종교로 받아들여지면서 집회도 잦아짐. 정부는 탄압시작. 북경교구에는 성직자파견 요청. 1794년 주문모 신부 입국하여 1801년 체포 순교함. 33년간 성직자 없이 교회부흥운동을 펴나감. 1831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구 설정함. 브뤼기에르 소주교를 임명하였으나 입국 전에 병사함. 후임교구장으로 앵베르 범주교가 다른 유방제, 모방, 샤스땅 신부가 입국함.
137. 교회가 받은 탄압
사상적 (--유교의 양반 사상과 천주교의 평등사상이 부딪힘), 사회적(천주교의 제사거부), 정치적(당파싸움의 방편으로 이용됨) 이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교로 낙인찍고 인륜을 거스르는 단체이며 모임이라고 단정. 유교의 배타주의, 정교합일주의, 당쟁과 세도정치, 쇄국이양주의의 복합적 결과.
이런 탄압을 가리켜 박해(迫害)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크게 4대 박해와 한번의 작은 사건이 있다.
137.1. 신해교난(1791)
: 전라도 진산에서 윤지충(바오로)와 권상연(야고보)가 조상의 신주를 불살라버린 사건 때문에 피신했다가 자수하여 결국 사형 당함. 이 사건이 확대되어 이승훈, 권일신 등도 삭탈관직됨.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자 수는 더욱 늘어났다.
137.2. 신유박해(1801)
: 정조 후임으로 순조가 즉위(1801)하자 조모(祖母)인 대왕대비 김씨가 실권을 잡고 천주교와 가까웠던 시파를 제거할 목적으로 천주교 탄압. 이가환, 권철신,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주문모 신부등 3백여 명의 신자들이 순교함. 1834년 유방제 신부가 입국할 때까지는 조선에 신부가 없었다. 1831년에 교황청은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빠리 외방 선교회가 맡게됨. 신자수가 9천여 명까지 늘어남. 1836년경에는 김대건, 최양업 도마등 3명의 신학생이 유학 떠남.
137.3. 신유박해 때 즉 1801년 10월에 전국에 천주교 금지교서를 내리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 오늘날 이른바 사학이라는 것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헐어 없이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짐승으로 돌아가게 한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이에 물들어 그릇되어 가니, 이 어찌 슬프고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이 아니랴 !.... 잡아서 뉘우치지 않는 무리가 있거든 반역죄로 다스려라.... 수령은 각각 그 맡은 바 지방에서 오가 작통법 (다섯 집씩 반을 만들어 그 중에 천주교 신자가 있으면 관에 고발하도록 하는 제도 )을 밝게 실시하여........... 사학의 무리가 있거든 곧 관에 고하여 죄를 다스려 사학을 뿌리째 없애버려 남은 씨가 없도록 하라 " << 순조실록 >>
137.4. 기해박해(1839)
: 순조 후 헌종이 즉위하자 외조부인 조만영이 시파를 축출하기 위해 탄압시도. 외국인 성직자가 있다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 박해로 성직자 세 명(앵베르, 모방, 샤스땅)과 2백여 명의 신자들 순교함. 천주교가 사교라는 척사윤음을 발표. 이때 신자수는 1만여 명 이상. 정하상은 ‘상재상서’를 지어 천주교를 변호하고 박해의 부당함을 알림.
137.5. 병오박해(1846)
: 김대건이 최초의 사제(상해 긴가항 성당)가 되어 1845년에 귀국. 그러나 1년도 안되어 체포되고 1846년에 교우 9명과 함께 새남터에서 순교함. 이후 철종이 즉위하자 교회에 대한 태도가 너그러워진 듯. 12명의 프랑스 선교사가 활동. 신자 수는 2만3천에 이르기까지.
137.6. 병인박해(1866)
: 철종 이후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의 섭정. 조정의 인물들이 외국세력에 대항하여 천주교 반대. 자신의 입지를 튼튼히 하기 위해 박해시작. 가장 대규모로서 9명의 성직자와 8천여 명의 신자들 순교.
전체적으로 약 100년 동안 1만여 명의 교우들이 순교함. 103명이 1984년 5월 6일, 한국을 방문하신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하여 여의도 신앙대회 중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38. 박해의 가장 큰 원인
박해의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인 것으로 반대세력을 몰아 내려는 한 방편으로 천주교를 희생으로 삼았다... 또 다른 이유로는 조선에 외국인 신부들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외국신부들을 처단하기 위해 교우들을 잡아 들였다... 조정에서는 전국에 척사윤음을 공포함으로써 박해령을 내려 전국에서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다... 이 박해 때에 앵베르 주교와 샤스땅 신부, 모방 신부가 순교하였다...두 신부는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도 교황청에 조선교회의 형세를 적어 보냈다... 그에 따르면 당시 교우 총수 약 1만명 예비자 600명이었다...
139. 종교의 자유와 오늘의 교세
쇄국정책에서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문호개방. 1883년에 독일과 영국에 맺은 문서에서 종교의 자유를 명기함. 1886년 한불통상조약으로 완전한 신앙의 자유보장.
1888년에는 최초의 수녀회 ‘샬트르 바오로회’가 진출. 성서 출판소를 열어 교리서 발간시작. 1893년에는 약현성당(중림동)이 최초의 양옥으로 준공. 1898년에는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인들의 모임자리였던 김범우의 집에 명동성당이 들어섬. 1906년 경향신문 1907년 경향잡지 창간됨.
1925년에는 79, 1968년에는 24위가 복자로 시복됨. 1984년에는 현 교황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 1997년 말 현재 신자수가 300-310만 명이라고 한다.
140. 종교 분열에 대한 종합
박해는 신앙의 눈으로 보면, 교회의 승리입니다. 박해를 통한 교회의 발전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천주교에 허용된 신앙의 자유도 무수한 순교자들의 피의 대가라는 것을 알아야. 순교는 신앙증거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육신을 죽이는 이를 초월한 하느님의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이다.
오늘날은 예전과 같은 순교는 없다. 불가능하다고 해도 그 정신으로 살아가야.
가정에 충실하고 가족을 위해서 시간을 할애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족의 평화와 화목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죽이는 삶이 가장 먼저 요구되는 순교의 삶이다. 순교는 반드시 행위로 표시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명(使命)
141. 위에서는 세계 교회의 역사와 한국 교회의 역사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간단하지 않은 역사를 교회라고 하는 무형의 형체가 갖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다음으로는 이 교회의 사명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잠시 ‘교회의 사명’을 말씀에 대해 드리기 전에 다시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해 강조하겠습니다. 짧게 말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예수를 인류의 구원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와 성서에 나오는 말을 정리하면, ‘하느님의 백성, 그리스도의 몸’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갖는 교회의 역사가 이제까지 있어왔던 삶의 발자취를 말씀드린 다음, 이제는 그 교회가 이 세상과 사람들에게 어떤 일을 하는 공동체인지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교회의 사명에 대해서는 ‘초대받은 당신’ 31과(142면이하)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말을 몇 가지로 나눠서 설명하는 것 정도로 하겠습니다. 그 교회의 사명을 표현하는 예언직, 사제직, 왕직으로 말하는 것은 옛날의 분류방식입니다. 의미는 현재의 것으로 번역해서 알아들어야 할 것입니다.
142. 예언(豫言)직무(職務)는 말 그대로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는 임무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 사는 그 누구도 성서에 나오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이제는 필요 없다고 할 수도 있고, 사람들이 너무나 현명해졌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듣는 사람들이 없다고 하는 것도 옳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하느님의 뜻을 이 세상에 전하는 직무를 가리킵니다. 각자의 개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듣는 방법은 성서를 통해서, 전례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들려오는 소리 경청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짐으로 해서 우리가 삶의 활기를 얻었다면, 그것이 우리로만 끝나지 않게 다른 이웃들에게도 널리 퍼져 나갈수 있도록 함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언은 단순하게 지붕에서 고함을 지르는 말로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행동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이 행동 방법에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과 같은 <협박>이 포함될 자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삶의 활기를 주고, 나도 역시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삶의 활기를 얻는 방법이 바로 이 예언직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43. 성화의 사제(司祭)직무(職務)는 대충 이야기하면 주교와 신부에게 적용되는 용어로 알아들을 우려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하느님의 뜻에 맞게, 거룩하게 하는 일차적인 임무는 그들에게 있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 역시도 평신도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성화의 임무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봉사라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봉사라는 임무와 그 역할은 그리스도 신앙인이면 누구나 부르심 받은 역할입니다.
144. 봉사를 실천하는 왕(王)직무(職務)는 구체적인 행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할에서 이야기하는 왕(王)이라는 말을 흔히 우리가 아는 전제군주 시대의 그 왕(王)과 혼동하면 잘못 알아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5천 명을 먹게 하신 기적 다음에는 거기에 참여했던 사람들로부터 왕으로 추대 받을 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자리를 피합니다(요한복음 6,15). 마음에 들지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것이 당신이 나가실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요?
정치 권력자로서 예수님을 사형에 처한 폰티우스 지방 출신 빌라도의 고민은 더했을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5장에 나오는 것처럼 빌라도는 사형선고의 일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마르 15,2)’라는 질문에 올바른 답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로마에 대한 반역자의 죄목이라면 그것 외에 다른 것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사형선고 명패에는 그 말이 적히고 맙니다.
‘유대인의 왕 나자렛 예수(IESUS NAZARENUS REX IUDAIOS)-마태 27,29'이라는 죄명을 쓰고 죽은 예수님에게 적용된 말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왕이었으면 이러한 모습으로 죽으려고 했을까? 모르긴 해도 우리가 왕으로서 직무를 이야기할 때 알아듣는 말의 의미는 달라야 할 것입니다. 왕으로서, 12군단이상을 호령할 수 자격을 갖춘 분(마태 26,53)이 무력하게도 그렇게 죽고 맙니다. 이것은 우리가 신앙에서 갖는 용어와 일상생활에서 갖는 용어의 의미를 구별해서 알아들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이러한 자격을 갖추었던 분이 산 자세가 바로 왕으로서의 직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것을 알아듣는 우리도 올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에게 참된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서 참된 삶이요 그 길을 알려주었던 직무를 우리도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런 힘을 서로 잃지 않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소리도 될 것입니다.
마리아. MARIA
이제는 교회와 직접 관련되는 인물에 대해서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앞서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드렸으니, 성서에 나오는 인물 하나를 통하여 교회와의 관련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이 인물은 여성으로 등장합니다. 그가 했던 역할은 대단히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고 하는 편이 올바를 것입니다. 인물의 이름은 마리아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여인, 마리아를 가리켜서 교회의 어머니요, 신앙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에서는 남들이 이상한 시각을 갖고 쳐다 볼 정도(?)로 마리아를 공경하고 그를 통한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45. 마리아에 대하여
먼저 본론에 이야기 드릴 마리아를 이야기하기 전에, 마리아라는 이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이름은 대단히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우리 이름에 영희, 철수라고 이름 붙이듯이 아주 보편적인 이름이었고, 속된 말로 길에 돌멩이가 있듯이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흔한 이름을 가진 여인을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셨고 삶의 본보기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성서에는 우리가 이 시간을 통해서 보고자 하는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탄생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등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몇 부분 언급되어 있는 것을 골라서 봐도, 그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분량은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결론 한가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혈통은 모계혈통제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과거역사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한 중요성을 따지고 역사를 이끄는 주체는 일반적으로 남성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세계에서 여성에 대한 역할을 이렇게나마 성서에 담고 있다는 데서 대단한 중요성을 가진 분으로 설명을 합니다. 현대의 시각으로 봐서 마리아라는 여인에 대한 언급 분량이 적은 것이지, 결코 적은 분량이 아니라는 공통적인 견해가 있습니다. 그 마리아에 대해서 4개의 복음서에 기록하는 내용부터 보기로 하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서 :
1,16에는 예수의 족보에 대해서 나오는 과정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다’는데서 등장합니다.
1,18-25에서는 예수를 잉태하는 여인으로 나옵니다.
12,46-50에는 복음선포에 나선 아들을 찾아보는 한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마르코 복음 :
아들을 찾아보는 경우에만 언급됩니다.(3,31-35)
루가복음 :
1,26이하, 예수를 잉태하게 되는 과정에서 천사의 방문을 받고,
1,39이하에서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기쁨의 노래를 부르고,
2,22-40에서 아기 예수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봉헌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2,41-52에서 예수나이 12살에 일어난 사건을 가슴속에 새기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요한복음 :
2,1-11에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 기적을 요청하는 자상하신 어머니로 등장하고,
19,25-27에는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교회에서 기도하는 대상으로 언급하는 중요성(?)과 견주어 보면, 성서에 나와있는 분량은 적은 편입니다.
<초대받은 당신에서는 ‘구약에 예언된 마리아, 구원의 협조자로서 마리아, 구세주의 어머니요 우리의 어머니로서 마리아, 교회의 모범으로서 마리아’를 언급한다. >
146. 마리아에 대한 호칭 1 -- 교회의 어머니
성서의 내용에 위와 같이 많이 언급되지는 않지만,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고 합니다. 아들을 가장 가까이 보아왔고, 인류의 구원사업을 처음부터 지켜보았다는데서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물론 그 예수를 믿고 따른 사람들로써 교회가 이루어졌으므로 그 믿음을 처음부터 간직했던 분으로서 ‘교회의 어머니’라고도 부릅니다. 즉 믿는 자들, 신앙인들의 삶의 모범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또한 모든 일을 가슴에 품고 이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자세를 먼저 앞세우기보다 하느님의 자리를 먼저 생각했던 여인, 마리아의 자세를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147. 마리아에 대한 호칭 2 -- 신앙인의 어머니
이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이 죽었다고 부활, 승천하신 뒤에서 꾸준히 제자들의 모임에 함께 합니다(사도행전 1,14). 이것은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신 경우라 할 것입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데서도 아들을 꾸준히 믿은 결과로 일어난 가나의 혼인잔치의 경우를 보면서 우리도 신앙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새로운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서, 사랑하는 제자 요한을 향하여 ‘이 분은 네 어머니(요한복음 19,25-27)’라고 하시며 맡기십니다. 마리아는 분명 특별한 신앙심을 가지고 아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모든 것을 간직하고 가슴에 새기신 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 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 분을 우리의 어머니로 공경하는 것입니다.
148. 마리아 공경은 우상숭배인가? -- 가장 커다란 반발에 부딪히는 질문
가톨릭, 천주교는 마리아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종교인가? 가장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부딪히는 질문이며 동시에 가장 대답을 하지 못하는 질문입니다. 물론 이 질문을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목사들에 의해서 교육을 받은 개신교 신자들입니다.
올바른 답을 먼전 말씀드리면, “그렇지 않다. 그것은 제대로 모르며 덤비는 사람들이 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몇 가지의 방법으로 말씀드리죠.
149. 자신을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부모가 어리석고 바보 같고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한다고 해서 멸시하는 자식치고 제대로 되는 놈이 없는 법입니다. 혹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는 편이 올바를 것입니다. 좋든 싫든 그러한 부모가 있었기에 그 사람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잘난(?) 자식이 있을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모가 못났으면,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죠. 거기서 내 부모가 엉터리요, 바보요, 나를 사람 대우 해주지 않는다고 말해야 ‘그 사람 참 똑똑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갈 데까지 다 간 세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좋든 싫든 간에 개신교의 뿌리는 천주교입니다. 프로테스탄트의 뿌리는 가톨릭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개신교가 태동할 때에 천주교에 잘못된,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요소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정리가 되었고 지금은 그러한 요소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비판의 대상이었던 일들에는 ‘가톨릭 신앙이 마리아와 관련된 요소’는 없었습니다.
150. 이런 사람들은 신앙이란 무엇인지 그 내용부터 다시 공부해야 합니다. 우상이라는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숭배가 무슨 뜻인지, 신앙의 대상은 무엇인지를 말입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덤비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이 무서워서 피하거나, 몽둥이로 맞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죠. 그러나 사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이나 말을 듣는 사람이나 똑같은 인격체인데 말입니다. 인격체는 인격체로 대우 해야죠. 그것이 통하지 않을 때는 그저 돌아서는 일밖에 다른 대응책은 없습니다.
151. 성서에 나오는 우상 숭배 모습
우상숭배(偶像崇拜-Idolatry)라는 말은 우상(偶像)과 숭배(崇拜)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이 ‘우상’의 뜻은 ‘어느 표상(表象)이나 사물로 표현되는 거짓 신(神)에게 그 신이 그런 곳에 내재(內在)한다고 믿고 하느님께 드릴 예배를 바치는 행위’입니다. 또한 ‘하느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그것을 인생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아 추구하는 행위’도 가리킵니다.
성서에 나오는 우상숭배의 대표적인 행위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황금송아지 경배사건입니다. 광야를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90일만에 시나이 산에 도착합니다. 홍해를 건너는 일에서 이집트 병사에게 쫓기고 광야에 들어와서는 물이 없어 고생하고 먹을 게 충분하지 않아 고생하면서 노예생활이라도 좋으니 과거의 생활을 그리워합니다. 그러던 차에 그들의 영도자 모세가 시나이 산에 올라가서 40일 동안 내려오지 않습니다. 그러자 이집트를 탈출한 백성들은 자신들의 불안한 마음에 중심을 잡는다면서 이집트에서 가지고 나온 금붙이로 황금송아지를 만듭니다. 그리고 외치는 소리 ‘이스라엘아 이 신이 우리를 이집트에서 데려내 온 우리의 신이다’이라고 선언합니다. 물론 순리에 어긋난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느님께 마땅히 드려야 할 공경의 자리에 인간이 만든 조물(造物)을 놓고 하느님께 드려야 할 예를 드렸으니 그것을 가리켜 우상숭배라 합니다.
무식한 사람은 본래 용감합니다. 잘 모르면서 가톨릭 교회를 향하여 외치는 소리 ‘우상숭배 종교’하는 소리에는 대꾸할 필요조차 없는 무고죄에 해당하는 것이고 무식한 소리입니다. 본래 남대문을 보고 직접 보지 못한 사람과 말씨름이 붙으면 못 보고 설명하는 사람이 이긴다고 했습니다.
152. 현실을 돌아보기
한편으로 마리아를 우리가 공경하면서 ‘우상숭배’의 소리를 듣는 것이 슬프기는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제대로 된 삶의 중심, 믿음의 중심을 가져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특히 가톨릭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많은 경우 구태의연하기도 합니다. 그 소리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심이라는 것이 공부를 통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절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을 만나곤 합니다. 그렇게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만 골라서 그런 질문을 하니 대답을 못하죠. 그러면서 성당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하죠. 그러다 보면, 자신의 생활에 확실성을 두지 못하고 이 종교, 저 신앙으로 흘러갑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종교가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합니다. 거기 신자의 90%가 ‘옛 신앙은 천주교였다’고 한다는 웃지 못할 소리가 있습니다. 여호와 증인의 주(主) 선교대상은 천주교 신자라는 소리도 있습니다.
153. 그러므로 천주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비판받을 소지가 있는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제대로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동 때문에 당연한 공경을 받아야 할 성모님이 우상으로 전락하지는 않는지 정확히 가릴 필요는 있습니다.
분명히 마리아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만 드리는 공경을 받을 수 있는 인물, 역할, 중요성을 가진 분은 아닙니다. 보통의 인간보다 뛰어나고 남다른 역할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공경하는 것은 보통의 인간이 하기 힘들만큼 하느님의 뜻에 일치했고 그 분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154. 성서에 나타난 마리아의 행동은 어떤 것이 있는가?
율법에 따라 미혼모는 돌에 맞아 죽어야만 할 상황에서 아기를 임신하겠다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분,
성전에 아기를 봉헌하면서도 모진 소리를 들어야 했던 분,
12살 사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전혀 몰라보는 듯한 섭섭한 소리를 듣고도 그대로 참으신 분
장성한 아들이 미쳤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 나섰는데도, 전혀 어머니로서 대우하지 않은 슬픔을 감내하신 분,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어머니의 견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데도 그래도 굳은 신뢰심을 가졌던 분,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어 그 슬픔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분(=삐에따 상) >
이러한 모습이 우리 신앙인들의 삶에 모범이 되기에 ‘가톨릭 신앙’에서는 신앙인의 모법으로 그녀를 공경하고 특별한 예우를 바치는 것입니다. 흔히 모르고 말하는 이들의 견해에 현혹되지 말고 우리 삶의 중심을 올바로 잡아야 할 일입니다.
흠숭= adoratio(n)-숭배,존경,숭경 공경=veneratio(n)-존경,숭배,경의
155. 물론 가톨릭에서는 특별한 삶의 본보기를 가졌던 마리아를 가톨릭교회에서는 특별한 예우로써 공경합니다. 같은 공경의 차원이긴 하지만, 교회는 그 용어를 달리 씁니다. 이렇게 달리 쓰는 것은 불란서의 영향을 받은 한국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는 흠숭지례<欽崇之禮-천주께만 드리는 최고의 공경, 마리아에 대해서는 상경지례<上敬之禮-성인이나 천신의 지위보다 훨씬 높은 성모마리아에게 대한 특별한 공경>, 성인들에 대해서는 공경지례(恭敬之禮-성인에게 드리는 공경) 용어를 사용하며 그 격을 달리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알지 못하면 마리아 공경을 우상 숭배하는 것과 구별하지 못하고 잘못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들이 무식하다는 소리 외에는 그 어느 것도 아닙니다.
156. ** 가톨릭 교회의 성인공경에 대해 **
1) 교회전승을 통하여 이어져 온 교회 영성(靈性)의 한 요소. -- 성서에는 명백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입니다.
2)트리덴틴 공의회(1545-1563년 사이 개최)에서는 종교개혁자들에게 성인공경에 관하여 설명하고 신자들에게 그 남용이나 지나침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DS984-988). 종교개혁자들은 성인의 전구(轉求)가 하느님 말씀에 반대되며 하느님과 인간사이에 한 분의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1디모2,5)의 영예를 해치는 것이라는 주장을 배격하면서, 우리의 주님 홀로 우리의 구원자요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 성인들을 불러 도우심을 구하는 것은 마땅하고 유익한 일(DS 984.989)
3) 성인들을 존경하고 도움을 청한 사례가 폴리카르포의 순교록(2세기)에 처음 나타난다.
4) 성인공경은 절대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안에서 하느님 아버지께 바쳐지는 흠숭을 약화시키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더욱 완전케 한다. (2차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51)
(신앙인의 성모님 공경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에 도움을 주는 분이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157. 이러한 마리아는 왜 그리도 커다란 중요성을 갖는가? <성서와 성전에 근거하여>
성서를 많이 이야기하는 종파-특히 개신교-의 입장을 이해하면, 성서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는 이 여인을 가톨릭에서는 왜 그렇게도 중요한 취급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응답은 삶의 신조가 성립된 배경의 차이에 따른 것이므로 가톨릭에서 설명하는 말을 그들은 다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먼저 가톨릭의 신앙신조에 대한 것은 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신앙신조에 해당하지 않는 것은 성전(聖傳-Tradition)에 근거해서 생긴 것이 많습니다. 성서도 어쩔 수 없이 역사가 흐름에 따라서 사람의 손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사람의 자의(自意)에 의해서 마음대로 쓰여지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가톨릭에서는 영감(靈感-성령의 인도하심)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느님의 도우심과 그 인도로 성서가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람들이 성서를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하느님의 도우심 없이는 완벽하게 알아들을 수 없다는 것이며, 마음대로 해석할 수 없다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성서를 마음대로(?)해석하고, 성서 해석의 차이와 그 방식에 따라서 파(派)가 갈리는 입장에서 본다면, 도대체 성서의 중요성을 어디에다 두고 있는지 성서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혹시 밥 벌어먹는 수단이상의 것은 아닌지>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해석은 저희들 맘대로 하고, 알아듣기 어려운 내용은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자가당착이죠.
가톨릭의 역사는 짧지 않습니다. 근 2000년에 가까운 역사입니다. 사람이 자기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활동하고 자기 생각을 펴는 시간은 기껏해야 40년 혹은 60년 미만입니다. 좀 더 긴 사람도 있겠죠. 그리고 성서에 나오는 바에 따르면, 인생은 기껏해야 70년이고 근력이 좋아서야 80년(시편90,10)이라고 습니다. 겨우 그렇게 짧은 인생의 길이 가지고서 하느님의 모든 신비와 업적을 알아들으려고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 행동이죠. 그러다가 결국 자기논리에 부딪히면, 성서에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도 맞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이 있고 해결이 되지 않는 일이 따로 있는 것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은 자기 삶에 많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사람도 역시 그 행동에 훗날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그저 때가 이르자 ‘내가 다 잘못했으니, 용서해주오!!!“하는 소리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인생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마리아를 공경하고, 그를 통해서 기도하는 것은 성서에 근거한 기록이라고 하기보다는 성전에 근거한 것입니다. 사람의 세계에서조차도 글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사람의 생활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나 내가 살펴보기 이전에 글로 쓰여진 것이 없다고 해서 그 중요성을 무시하는 것은 너무 속보이는 이야기입니다.
158. 마리아를 통하여 드리는 기도 - 로사리오 기도(=묵주기도)
교회는 마리아를 공경합니다. 그러나 그 격(格)이 다르다는 것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이렇게 공경하는 마리아를 통하여 드리는 기도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묵주기도, 혹은 라틴말로 로사리오<Rosarium-장미꽃다발>입니다. 이 로사리오 기도가 생긴 데에는 몇 가지 유래가 있습니다. 하지만 확정적인 것은 없고 이런 영향을 받아 형성된 기도입니다.
첫 번째는 도미니코(1170-1221) 성인이 선교하는데 어려움을 당하여 성모께 도와주시기를 기도하던 중 성모님이 나타나시어 묵주를 주시고 묵주의 기도를 널리 전하라고 하셨다는 설이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12세기에 문맹자(文盲者)들이 전례에서 시편의 구절을 읽는 대신 주의기도 150회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 암송하던 관습에서 발전되었다는 설 등이 있습니다.
묵주 기도가 현재의 모양을 갖추는 데는 교황 비오 5세의 칙서(1569년)에 따른 것이라 합니다. ‘성모송 10번과 주의 기도와 영광송 각 한번이 모여 한 단을 이루고, 그 한 단이 모여 5단 또는 15단을 이룬다’. 이 묵상기도의 내용은 구원의 역사이며 환희의 신비, 고통의 신비, 영광의 신비로 구분하였다. 또한 각 신비는 5개의 묵상주제로 이루어져 있다.
로사리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며 염경(念經)기도를 드리는 것이요, 가장 먼저, 가장 깊은 체험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사신 성모를 통하여 그분의 신비를 묵상하는 것이므로, 로사리오는 그분의 신비에 접근하고 친밀해지며 구원의 신비에 일치하면서 성모처럼 인류구원의 협조자 구실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
성모는 1858년 루르드에서, 1917년 파티마에서 각각 발현(發顯)하여 로사리오 기도를 열심히 하라고 당부하였다. 교회는 로사리오 축일을 지내고 로사리오 성월(聖月)을 정하여 로사리오에 의한 신심을 장려한다.
159.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의미? -- 묵주기도는 아주 단순한 일의 지속적인 반복입니다. 전체를 통하여 사도신경 한번, 주의기도 6번에 성모송 53번, 영광송 6번입니다. 때로는 이렇게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의미가 무엇일까 궁금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의미를 완벽하게 알면서 사람이 하는 일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일단 일을 먼저 하고 난 다음에 그 의미를 깨닫는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인들이 하는 기도도 대표적인 것입니다. 예전에 선참후계(先斬後啓)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군율(軍律)을 어겨 잘못을 범한 이를 먼저 처벌한 다음 보고한다는 의미로, 먼저 행동하고 그 의미를 나중에 찾는 것에 조금은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죄인이 죄를 범한 다음 도주할 것을 우려해서 하는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생각으로 논리로 따진 다음에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하고 난 다음에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훗날에도 기도<초대받은 당신 35과 언급>편에서도 말씀드릴 기회가 있겠습니다만, 기도는 먼저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로 시작한 우리의 행위는 다소 정성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이 받아들이시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로사리오를 실제로 해 보기>
160. 묵주 배부와 기도하기-실제로
기도의 순서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긴 했습니다만, 오늘 5단의 기도를 한번 하겠습니다. 시간이 정 바쁘신 분은 먼저 가셔도 좋겠습니다. 마침 기도로 여러분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기에 앞서, 여러분들이 제대로 배우면서 하는 일은 오늘이 처음 일테니까, 잠시 이 기도를 통하여 여러분들이 얻고 싶은 은총의 선물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노파심에서 말씀드린다면, 돈이라든가 부귀영화는 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솔로몬의 기도> - 1열왕기 3장 3절 - 15절 : 구약성서 1경전 524면-525면
솔로몬이 기브온에서 제사를 봉헌한 다음, 잠을 자다가 하느님을 꿈에서 만납니다.
하느님은 솔로몬이 정성을 다해 봉헌한 제사가 맘에 들었는지, 그에게 무엇을 해주었으면 좋겠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왕으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먼저 청합니다. 그러자 하느님 하시는 말씀이 재물이나 부귀영화를 먼저 청하지 않은 자세가 기특하여, 청하지 않은 그것까지도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런지, 훗날 이 솔로몬에 대한 평가는 ‘그보다 현명하고 지혜로운 왕이 없었다고 전해지고, 당대에 그만큼 화려하게 부유하게 살았던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가 됩니다.
기도를 위한 올바른 자세의 본보기의 한 사람입니다.
이제 여러분들도 마음속으로 한번씩 청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가리켜 교회에서는 지향(志向)이라고 합니다.
묵주의 기도 후에는 방사(放赦)의 개념을 설명하기.....
161. 방사<Consecration : 신성하게 만듦. 신에게 바침> : 영신적 이익을 위해 성직자가 십자가, 상본, 묵주 등에 기도해주는 것을 말하며, 준성사의 하나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봉사를 위해 정해진 사람이나 사물을 축복함으로써 이들을 세속에서 분리하여 하느님께 속하게 하는데, 방사는 사물을 축성하여 하느님 예배에 전용되게 할 뿐아니라 이에 대사(大赦)를 붙여 그것을 사용하는 신자들로 하여금 성사들을 예비하고 신앙생활의 성화에 도움이 되게 한다. 방사의 효력을 얻기 위해서는 믿고 사랑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성사(聖事). SACRAMENT
162. 오늘부터 시작하여 다루게 될 성사에 관한 이야기는 쉽고도 어려운 부분입니다. 쉽다는 뜻은 예비자 교리에 임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당장 적용되는 부분이 많지 않기에 길게 이야기드릴 성격이 아니라는 뜻에서 쉽다는 것이고, 어렵다는 이야기는 표현이나 말은 분명 사람의 말을 쓰지만, 인간사(人間事)에서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기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본래 그렇게 아리송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63. 먼저 ‘성사’라는 말의 뜻부터 말씀드리고 나서 이 부분을 시작하겠습니다. 가톨릭 대사전에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사(聖事)’란, ‘감각적 상징을 통해 효율적인 은총을 낳게 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것’ 또는 ‘외적행위로 나타나는 증표로 인간의 감각이 도달할 수 없는 감추어진 하느님의 은총이 감각적인 형태를 통해 전달되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감각적 상징이란,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거나 다른 기관으로 느낄 수 있는 행위들을 가리킵니다.
164. 이렇게 사람의 일이지만,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는 특별한 일, 즉 성사에 가톨릭 교회는 일곱 가지를 정하고 설명합니다. 이 성사라는 통로(通路)를 통하여 사람은 하느님께 보다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을 얻게 됩니다. 예비자 교리서에도 나오겠지만, 순서라도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하니까 여러분들이 외우지는 않더라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세례성사, 고해성사(화해성사), 성체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 신품성사, 병자성사의 일곱 가지 입니다. 이 일곱 가지의 성사에는 앞서 말씀드린 사전에 나오는 말대로, 사람의 행동과 더불어 교회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서 진행되는 예절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드린 일곱 가지 말고도 ‘성사’라는 용어가 붙는 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준성사, 판공성사, 등의 말은 이 예비자 교리의 ‘하느님의 성총을 얻는 방법’편에 나오는 성사는 아닙니다. 다만 비슷한 성격이나 뜻은 있습니다. 훗날 말씀드릴 기회가 따로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165.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게 하는 성사입니다. <BAPTISMUS>
이렇게 태어난다고 하는 의미에는 상속자가 된다는 것도 포함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고 자라면서 하느님을 ‘호주(戶主)’로 모신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따로 생각해 봐야 합니다만, 세례성사는 하느님과 한 가족이 된다는 의미가 있는 성사입니다.
이렇게 하느님과 한가족이 되기 위해서 여러분은 이 예비자 교리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린아이들<=초등부 2년 학생이전>에게는 여러분들처럼 이렇게 하는 예비자교리를 거치지 않고 먼저 세례를 주기도 합니다. 물론 적당히 성장한 후<3학년이후>에 기초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는다는 조건이기도 하고, 부모님들에게 부탁드리는 의미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린이에게 조건부 형식(?)으로 세례성사를 주는 것은 여러분이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자녀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습니다.
이 세례성사를 이루는 예절에 대해서 간단히 말하면, 전례예식 가운데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에게 세례를 줍니다’하며 축성한 물을 이마에 붓고, 십자표를 세 번 긋습니다. 물론 집전자는 사제입니다. 이 예절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며,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상속자가 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세례성사를 가톨릭 교회의 입문(入門)성사(聖事)라고도 합니다.
이 세례성사를 표시하는 구약성서의 역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역사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모세의 인도를 받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죽음의 위협에서 생명의 땅으로 들어섭니다. 물을 가르고 바다를 건넜고 그렇게 물을 건넌 것이 생명으로 건너가게 된 것임을 의미하는 의미로 이마에 물을 붓는 것입니다.
또한 이 세례성사는 예수님이 세우신 것이라고 하며, 신약성서에 나타나는 기원을 두 군데에서 정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3,5의 물과 성령으로 다시 나야한다는 것, 요한복음 19,34의 ‘군인하나가 창으로 그(=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를 말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3,11-14에 보면, 세례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가장 먼저 세례를 베푼 사람은 요한이었지만, 그는 파견을 받고 온 사람으로서 세례의 원천이 예수라고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어떻게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십니까?”
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각 신자의 이마에는 인호(印號)가 새겨진다고 교회는 가르칩니다. 지워지지 않는(=세례를 물릴 수 없는) 하느님의 표식을 가리킵니다. 이 세례성사를 통하여 신자가 된 이들은 훗날의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최초로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166. <우리의 신앙을 굳게 해주는 견진성사> <SACRAMENTUM CONFIRM!ATIONIS>
두 번째로 초대받은 당신에 기록되어 있는 성사는 견진성사입니다. 이 성사도 입문성사로 분류하곤 했습니다만, 지금은 그 의미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견진성사의 의미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았고, 따로 교육할 내용들을 분리하지 않았기에 일반적으로 세례성사를 거행하면서 함께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리합니다.
견진성사는 ‘세례성사를 받은 신자에게 성령과 그의 선물을 주어 신앙을 성숙시키고 증거하게 하는 성사’입니다. 이 견진성사의 의미는 신앙을 성숙시키고 증거하게 한다는 의미 말고도 ‘신앙인으로서 성인(成人)이 되게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성인(成人)이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견진성사를 받은 사람이라야만 신앙인의 성인이 되고 세례받은 사람들의 대부(代父), 대모(代母)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춥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의 선물은 ‘슬기, 통달, 의견, 굳셈, 지식, 효경, 두려워함’입니다. 이것을 견진성사의 일곱가지 은혜라고 합니다. 또한 성서에 나와있는 성령의 선물들로는, 갈라디아서5,22<365면>에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를 이야기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견진성사의 모습 한가지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의 강림’사건입니다.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에게 ‘혀 모양을 가진 불’이 내려오고 제자들 삶의 형태를 완전히 뒤바꿔놓은 사건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의 모습이 사도행전 2장 이후에 잘 나옵니다.
현재, 교회에서는 세례성사를 받은지 1년 혹은 2년 사이에 견진성사를 받도록 권유합니다. 물론 견진성사를 받기 위해서 준비가 필요합니다. 짧게는 한달, 길게는 6개월 정도의 지속적인 교육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 기간을 통하여 신앙이 내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나는 그 의미를 삶에서 어떻게 드러내야 하는지 그 방법들을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봅니다.
견진성사는 일반적으로 교구에 계시는 주교님이 오셔서 본당 주임신부와 함께 공동으로 집전합니다. 견진성사의 특징은, 기름을 이마에 바르면서 “**** 성령 특은의 날인을 받으시오. 평화가 그대와 함께....”하는 예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67. 틀어졌던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용서와 화해의 성사<SACRAMENTUM POENITENTIAE: 뉘우침,화해>
고해성사<=화해의 성사>는 ‘자신의 삶을 뉘우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의 원만한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성사’입니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것처럼 많은 반대를 받은 성사가 드문 것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어떻게, 신부가 뭔데 죄를 용서해 주는가하는 질문과 반대에 끊임없이 부딪힌 성사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질문의 전부는 개신교의 고명(高名)하신 목사님들과 골수 신자들에게서 오는 질문들입니다.
그 질문에 응답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이 말에 대해서 응답을 할 필요는 있습니다.
이스라엘 과거 역사(=구약의 역사)에서 하느님 모독은 죽을죄에 해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죄를 용서한다고 선언하자 그 하느님의 말씀(=구약의 율법)을 연구해온 율법 학자들이 반발합니다. 마태오 복음서 9,3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온 중풍병자에게 “네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합니다. ‘사람에게 병이 생긴 것은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구약의 사상이었습니다. <민수기 12,1-16: 하느님이 모세에게만 이야기하시고 우리에게는 아무말도 하시지 않는줄 아느냐? 아론과 미리암이 이렇게 항의하자 미리암에게 문둥병이 생긴다.-->하느님께 반항해서 병이 생긴다. 모세의 기도로 하느님께서는 그 병이 치유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신다--진지 밖에 7일간 거주 > 그러므로 신약에서는 죄용서라는 말로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을 견지(繭紙)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을 양도하십니다.(마태오 18,18 --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이러한 권한을 행사하셨던 예수님이 선택한 제자들에게 그 권한을 맡기고, 그렇게 받아들인 권한과 의무가 많은 세월을 지내면서 교회에 의하여 선택된 사제가 예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고해성사를 집전합니다.
예수님이 하셨던 죄의 용서를 위한 절차는 교회에 의해서 다소 복잡하게 변형되었습니다. 예비자 교리를 하는 여러분들에게 따로 연습할 수 있는 기회가 있겠지만, 용서 청하고 용서받으려면 일정한 절차가 필요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정한 방법은 이 화해의 성사를 집전하는 방법을 다섯 가지 단계로 설명합니다. 성찰, 통회, 정개, 고백, 보속의 다섯 가지 단계입니다. 이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 번째 단계인 통회입니다. 사실상 통회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다른 것은 그저 통과하는 의례일 뿐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되 좋은 것을 먹고 내 몸이 건강하다면, 그것의 소화흡수와 더불어 어떤 과정을 통해서 내가 힘을 쓰게 되는지 몰라도 좋은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사제의 말은 다만 교회의 선언일 뿐입니다. 이 교회증인의 선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고백자(告白者)의 마음 준비이고, 그것을 가리켜 통회의 자세라 칭합니다.
이런 과정을 겪는 교회에서 정한 화해의 성사를 단계별로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1)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행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성찰(省察)이고,
2) 진정으로 반성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통회(痛悔)이며,
3) 잘못으로 인정한 것을 최대한 노력으로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고치기로 정하는 것이 정개(定改)이며,
4) 교회를 통하여 죄를 용서해주는 사제 앞에 들어가서 그 잘못한 것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 고백(告白)이며,
5) 사제의 판단에 따라 정하여 주신 일을 실천하여 죄를 용서받는 대가로 행하는 것이 보속(補贖)입니다.
이런 정도로만 말씀드리고 훗날 고백에 대한 단계를 따로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또한 아주 부수적인 일이겠지만, 신자들은 대단히 크게 생각하는 예절에 대한 연습은 따로 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교리의 이론적인 것이 대부분 끝난 다음, 실제 연습할 시간을 따로 만들기로 하겠습니다.
(인도의 힌두교에서는 인간의 죄를 씻는 방법이 목욕하는데 있습니다. 자와할랄 네루가 쓴 세계사 편력 1권의 52면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마흐멜라<힌두력 마흐달의 축제> 첫 번째 축제일인 산크란티 날에, 수천명의 순례자들이 떼를 지어 갠지스 강과 줌나 강이 만나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라바스티 강도 합류한다는 산감에서 아침 목욕을 하기 위해 간다. 이런 내용을 소개하면서 힌두인들의 신앙에 대해서 네루는 기록하고 있다)
168. 예수님의 몸이 있게 하고 우리가 받아 모실 수 있게 하는 성체성사 (----->미사에서 따로 설명한다)
이 부분은 미사에 대한 것으로 합쳐서, 맨 끝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신앙인들에게 생명을 주는 예수님의 몸을 이 세상에 있게 하고, 그 몸을 우리가 준비된 마음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성사입니다. 하지만, 이 성사는 단순하게 우리의 입으로 성체(聖體)를 받아 모시는 일로 끝나는 것은 아니고 더 깊은 의미가 있는 성사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모든 성사의 기본으로, 모든 전례의 중심과 바탕으로 정하는 성사가 바로 이 성체성사입니다. 이 성체성사에 대해서는 성사 뒤에 분리해서 따로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169.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일들의 부분을 할 수 있게 하는 신품성사<SACRAMENTUM ORDINIS>
신품성사(神品聖事)는 이 지상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신권(神權)을 주는 성사를 가리킵니다. 이 세상에 신권을 행사하는 것은 당연히 교회의 일 안에 제한됩니다. 이제까지 말씀드린 성사를 집행하는 권한과 의무를 말합니다. 즉 세례성사, 고해성사, 성체성사인 미사, 그리고 조금 있다가 말씀드릴 교회혼인 성사의 증인역할, 병자성사등 입니다. 그 각각의 세부사항은 따로 설명이 필요합니다.
이 성사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직까지 남자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서울 교구의 경우에는 미혼남자, 나이 28세이하, 신체와 정신이 건강한 자가 교구의 몇 가지 규정에 의거, 선발되어 교구 신학교에서 7년 또는 10년간의 교육을 마친 다음 사제로 서품됩니다. 말로는 간단하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 과정을 간단하게 요약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사제로 서품되는 사람들의 활동 분야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수도회 소속으로 움직이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교구소속으로 움직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자세한 구별이야 여러분에게는 필요하지 않겠지만, 각 본당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 교구소속의 사제들과 그 역할이고, 병원과 교육기관등 몇 종류의 특수분야에서 주로 활동하는 분들이 수도회 소속의 사제들입니다. 여러분들이 보실 수 있는 수녀님들은 이러한 수도회 소속에서 여성들의 활동분야입니다.
170. 하느님의 창조사업을 이어나가는 혼인성사<SACRAMENTUM MATRIMONII>
‘남편과 아내의 유일하고도 영원한 관계를 성화(聖化)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설정한 성사’가 혼인성사입니다. 이 혼인성사는 단순하게 살아야 할 의무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 행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시작하신 창조사업을 계승, 유지, 발전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19,1-12에 보면 혼인성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시는 부분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트리기 위하여 구약의 율법을 잘 알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와서 묻습니다. ‘무엇이든지 이유가 닿기만 하면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이러한 질문은 철저하게 왜곡된 사회, 남자들만을 중심으로 살던 세계에서 잘못된 삶의 습성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요구하는 질문에 고지식하게 답하는 것은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중요성을 ㅊ하는 사람으로 판단받을 수 있는 함정을 파놓고 그들은 예수가 그 함정에 빠지기를 그들은 기다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법을 제정하게 된 정신에 대해서 먼저 묻습니다. 왜 그런 법이 나오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법은 엄격하게 해석해서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교회에서 인정하는 혼인에 대한 정신이 나옵니다.
혼인하면 남자와 여자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이라는 것<5절>, 혼인은 하느님이 짝지워 주시는 일이라는 것<6절>, 한 남자는 한 여자와 결혼해야한다는 것<어기면 간음><10절>, 결혼하거나 하지 않을 수 선택은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것<11절>을 말씀하십니다.
이런 내용과 관련하여, 여러분들에게 예비자 교리를 시작하면서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드렸던 것입니다. 열심히 예비자 교리에 다 나오셔도 만일 이러한 혼인에 관해서 규정된 법에 위배되는 생활을 여러분들이 현재상태 하고 있다면 세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는 별 사항 없었습니다. 따로 제가 시간을 내어 개별적으로 면담을 하겠습니다. 그때라도 확인되면, 애석하지만 세례성사를 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에서 정한 혼인은 복잡합니다. 다른 성사를 설명할 때와 혼인성사를 설명할 때는 주체에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다른 성사는 신자들이 전부 대상이지만, 이 혼인성사에 대해서는 혼인 당사자가 주체(主體)입니다. 또한 교회의 사제는 단순히 ‘교회의 증인’ 역할 이상을 맡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정한 혼인 예절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양쪽 당사자의 동의(同意)입니다. 진정으로 상대방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겠는가? 그것을 모인 하객들 앞에서 큰 소리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합니다. 그 동의로써 혼인은 성사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 혼인제도만큼이나 복잡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매번 혼인 때마다 확인하고 또 확인하여 잘못된 일이 없도록 몇 차례 강조합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가질법한 내용 한가지만을 말씀드리고 혼인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혼인제도에는 ‘이혼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정한 법 규정에 따르면, 혼인 무효<나는 혼인인줄 알았는데, 사실은 혼인이 아니었다>는 있을지언정, 결코 이혼이라는 것은 없고, 또한 조건부 혼인도 없습니다. 흔히 말하는 계약결혼과 같은 모습도 없다는 것입니다. 기타 혼인에 관련된 다른 내용들은 따로 다루어야 하겠습니다.
171. 앓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함께 있음을 알려주는 병자성사<sacramentum unctionis(도유) infirmatiorum>
‘교회가 고통받으시고 영광 받으신 주님께 죽음의 위험에 처한 환자를 맡겨드려 주께서 그를 구원해주시도록 하는 성사’. 예전에는 이 성사를 종부(終傅)성사라고도 했습니다. 그 의미는 죽기 직전에 기름을 바르고 구원을 빌어준다고 했던 데서 기인하며, 마치 이 성사를 받고 나면 죽어야 할 것으로 사람들이 알아들었던 과거의 역사가 있기에 그렇게 불렸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용어입니다.
요즘에는 병자성사를 꼭 죽을 위험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병이나 노쇠함으로 죽을 위험이 엿보이는 신자에게 먼저 영신적인 목적을 위하여, 다음으로 육신 건강을 위하여 베푸는 성사’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단순하게 사제가 찾아가서 기름을 바르는 행위로써 기적을 일으키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잘 생각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병자성사에 앞서서 고해성사를 집전하기도 합니다. 병자 본인이 말하기 어렵다면 말없이 이루어지는 ‘전대사’라는 것도 있습니다.
병자성사에 대해서 성서에서 기록하는 부분은 야고보 사도의 서간 5,14-16(447면)에 나옵니다. 서간의 이 부분에 해당하는 ‘원로’는 교회의 직책에 따라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미사. MISSA, COMMUNICATIO
172. 미사라는 말은 ‘5세기경부터 서방 라틴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 제사를 재현하며 최후만찬의 양식으로 그리스도 친히 당신 교회 안에 물려준 가톨릭 교회의 유일한 만찬제사를 칭하는 말'입니다.
(만찬은 예수님의 이 지상 생애 가운데 제자들과 함께 한 마지막 저녁식사를 말합니다. 부활대축일의 3일전 성목요일--해마다 날짜가 이동됩니다.
미사라고 하는 말은 라틴말<MISSA>을 음(音)을 빌려서 읽은 것이기에 ‘미사’라고 하는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용어입니다. 이 미사에 대한 설명은 몇 가지 순서로 하겠습니다. 먼저 미사가 무엇인지, 미사에 대한 참여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미사의 효과는 무엇인지, 그리고 끝으로는 미사에 대한 세부적인 설명을 해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미사에 대한 세부설명을 할 때는 여러분이 사용하시는 ‘오늘의 말씀’을 가져오셔서 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제가하는 예비자 교리반에는 오늘부터 이어지는 미사에 대한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여러분들도 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할 것을 요청하겠습니다. 따로 강조가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신앙은 머리로 알아듣는 것이 아니고 삶으로 행동으로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73. 미사는 무엇인가?
미사는 위에 말씀드린 것과 다르게 좀 더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제사’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제사’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지상에 살아있는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 사람을 기억하여 바치는 행위를 가리킬 것입니다. 사람이 바치는 제사의 구성요소에는 조상에 대한 기억도 있을 것이고 음식도 차려놓는 일, 그리고 그 음식을 함께 나누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미사 구성요소도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차이나는 것이 있다면, 단순하게 이 세상에 살아 계시지 않는 돌아가신 분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저 친척을 중심으로 자신들과 관련된 조상들만을 기억하는 것은 아니고, 신앙에서 믿음에서 기억하는 예수님과 하느님 안에서 우리 조상들을 기억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또한 그 미사에 함께 한 사람들이 함께 기억한다는 데도 차이점이 있습니다.
신자들이 미사를 통해서 기억하는 예수님, 우리 조상들과 살아있는 우리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서 뭔가 좋은 일을 해 주시기를 바라는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땅에 묻히고 그 육신이 썩어버린 사람이 아니라, 지금도 하느님과 함께 살아 계신 분입니다. 그렇게 살아 계신 분이라고 그리고 당신께 기도하는 신자들에게 힘을 내려주시는 분이라고 고백하는 분입니다. 물론 이것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부활(復活)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애석한 것은 부활이라는 사건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 즉 신앙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사건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우리가 외친다고 해서 그 사실을 받아들일 의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여지지도 않는 분이고 설명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미사는 살아 계시는 예수님의 과거 지상생활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이 남기신 행적들을 통하여 우리 생활을 변화시킬 것을 받아들이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웃을 위해서도 우리가 마음을 모아 기도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힘을 얻는 것입니다. 미사는 신앙인 삶의 중심에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174. 미사에 대한 참여자세
미사에 참여하는 올바른 자세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씀드릴 순서입니다. 간단하게 얘기하면, 자세가 올바르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올바른 자세인가에 대한 것은 두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몸이라는 겉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중요한 면에서는 더 강조돼야할 마음의 문제입니다.
벌거벗지 않고 온다는 면에서 일단, 외형의 모습은 괜찮다고 봐줘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다가 전통적으로 강조돼온 자세에는 ‘다른 이에게 짜증을 내게 하거나 혐오감을 주지 않는 차림’이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법에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운동복 차림으로 미사에 참여한다가거나, 다른 이들로 하여금 이상한 상상력을 자아내게 하는 옷차림은 피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은 본인과 하느님과의 관계이긴 하지만, 사람인 관계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쉽게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른 체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속이 다 비치는 옷이라든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코를 막게 하거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자세라면 좀 더 정돈돼야할 필요가 있는 자세라고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보이지 않는 자세라면 마음의 문제일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제는 스스로에게 맡겨진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이 스스로를 돌아본 결과, 과연 본인의 자세가 합당한 것인지를 판단하고 올바르지 못할 때에는 올바를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운데 올바르지 못한 자세라고 본인이 스스로 판단할 경우, 바꿀 수 있는 방법으로는 ‘회개(悔改)’라고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죄(罪)의 문제와도 관련이 있는 것이긴 합니다만, 작은 죄<=소죄(小罪)>라면 정성 가득한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좋은 결심을 하는 것으로 가능할 것이고, 좀 더 커다란 죄<대죄(大罪)>라면 교회에서 정한 방법에 따라서 고해성사를 통하여 인간과 하느님 사이에 화해를 한 다음에 하느님을 찬미하는 제사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혹자는 ‘나는 사람에게 잘못했지, 하느님에게는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행위는 모든 것이 다 인간에게 관련된 것이긴 하지만, 그 일이 하느님께서 정하신 삶의 규범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도 하느님과의 관계도 틀어지게 만드는 것으로 봐야 할 것입니다. 이 고해성사에 대한 자세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잘 받아들여야 할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175. 미사의 효과, 목적
이러한 준비를 하고 난 다음에 우리가 참여하게되는 미사라는 제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제사의 목적을 세 가지로 말씀드리면, 하느님께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하느님께 잘못과 죄를 범했을 때는 속죄를 하고, 인간이 행복하고 생의 의의를 찾아 살아가는데 필요한 은총을 구하는 목적이 있다. 여기에다 굳이 한가지를 더 이야기하면 청원이라는 것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필요한 삶의 힘을 하느님께 미사를 통하여 바라고 내 바램을 들어주시고 내가 힘을 내어 움직일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176. 미사에 관한 설명의 전제조건
이제 미사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겠습니다.
미사에 대한 설명을 드리고 나면, 다음 시간부터는 여러분들에게 미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겠습니다. 성총을 얻는 방법으로서 성체성사를 간단하게 말씀드릴 때도 강조하긴 했습니다만, 천주교 신앙생활은 그저 알아듣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한 부분, 생활로 드러내기를 강조하기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제까지 여러 가지 다른 경우를 통해서 미사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들으신 분들도 있겠습니다만, 이제까지는 제가 미사에 참례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기에 그랬다는 단순한 이유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미사에 대한 설명을 다 끝내고 나면, 예비자 교리의 출석 때에도 확인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훗날 예비자 교리에 제대로 임하셨는지 그래서 세례성사를 받기에 합당한 준비를 하셨는지 판별기준으로 제가 활용하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미사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은 분들에게는 아무래도 그 문(門)이 좁아질 거라고 미리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제 1 장 개회식
177. 입당성가
미사는 입당성가로 시작한다. 로마 전례양식의 입당성가는 그레고리오 교황 무렵에 완성된 것으로 로마 시내에 많은 성당이 생기자 교황이 각종 축일을 기회로, 정해진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렸는데 이때 교황의 일행이 시편의 구절을 노래하였고 이들을 맞이하는 신자들이 시편구절에 응답하였는데, 이것이 입당성가의 기원(起源)이 되었다.
이러한 노래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하느님의 백성이 사제를 맞이하여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의 장(場)을 만들기 위한 역할로서 입당 성가는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입당송의 내용은 교회력에 적합한 것을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입당성가를 노래하지 않을 경우에만『미사경본』 이나『미사용 시편집』에 있는 입당송을 해야한다.
178. 인사
입당성가를 하는 동안에 사제와 복사들은 제단에 인사를 하고 자리에 선다. 제단에 대한 인사는 친구(親口)하거나 향을 피운다. 사제석은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 보이는 곳으로 모든 신자들을 대표하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의 자리로 적당한 곳이어야 한다. 사제가 미사를 시작하기 전 “성부와 성자와 성령(성신)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중세 때부터 써오는 관용어구와 “사랑을 베푸시는 성부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루시는 성령(성신)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모인 그리스도교 신자들 가운데 그리스도가 성령(성신)의 활동을 통하여 현존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성 바울로의 고린토 후서의 맺음말’로 입당 인사를 한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현존 의식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이 다음 사제는 그날의 미사<지향(志向)>을 간단한 말로 소개한다.
179. 참회(삶의 반성)
사제는 신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미사에 임(臨)할 수 있도록 참회의 기도로 초대한다. 이는 하느님께 제물을 바치기 전에 서로가 용서하고 오라(마태 5,23-24)고 이르셨기 때문이다. 신자들은 하느님을 거역하고 있는 것이 없는지 성찰하며 잠시 반성한다. 그런 다음, 일동은 일반 고백(고백의 기도)을 한다. 이에 사제는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소서”하고 사죄를 선언한다.
180. 자비송
자비를 구하는 찬가는 동방교회의 호칭 기도에서 로마 전례에 젤라시오 교황때 도입된 것인데 오늘날 남아있는 형태인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말 앞에 탄원기도가 있었다. 그런데 로마전례에는 봉헌 전에 공동기원과 봉헌문 중에 교회를 위한 기도와 청원 기도가 있기에 여기에서는 기도를 생략하고 “주여,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만 남게되었다.
181. 대영광송
대영광송은 그 기원을 4세기경의 그리스어나 시리아어의 아침 기도 에서 부분적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영광송의 가사 앞부분은 루가 복음 2장 14절의 천사의 노래로 시작되어 하느님께 대한 찬미와 감사를 노래하고 뒷부분은 그리스도에게 호소하는 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과 마지막에 성령에 대한 신앙도 포함되어 있다.
대영광송의 형식은 사은찬가(謝恩贊歌 : 떼데움)의 1 부와 같은 구조로 되어있다. 처음에는 말의 뜻을 잘 살린 간단한 선율이었으나 성가대가 생기면서 선율이 복잡해지고 다른 전례성가처럼 수준이 높아져서 교우들은 점차 노래하지 않던 과정을 거쳐 다시 신자들이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182. 본기도 (= 모음기도 )
개회식은 ‘본기도’로써 끝맺는다. 사제는 ‘기도합시다…’라는 말로 신자들을 기도로 초대한다. 이 말이 형식적인 것이 되지 않도록 기도의 내용, 기도의 동기 등에 관하여 간단한 말로 기도하기 쉽도록 인도한다. 사제가 대표하여 정식기도문을 바치고 신자들은 그 기도에 마음으로부터 찬동(贊同)하는 뜻으로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이 기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성신)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로 향하게 되어있다.
제 2 장 말씀 전례
말씀 전례 전체의 구조와 기능, 성서의 선택방법, 미사의 독서배분, 성서봉독, 응송, 사도 서간 복음 그리고 강론 ,알렐루야와 복음 전 노래, 신앙 고백,신자들의 기도 ,말씀의 전례에서 감사의 전례 (성찬의 전례)로 진행된다.
183. 말씀의 전례 전체의 구조와 기능
신자의 예배는 모여 하느님의 은혜를 상기하고 기념하며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먼저 성서를 봉독(奉讀)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의 중심은 부활의 신비이지만 그는 그의 전(全)생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바치셨기 때문에 주님의 생애 한 장면 한 장면이 구원의 신비를 이룬다. 그러므로 교회력은 부활절을 중심으로 1년 동안 그리스도의 전체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성서 봉독의 배당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미사중의 말씀전례는 그리스도 생애의 사건, 각 장면의 신비, 각 장소를 기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성서의 한 부분을 이해하려 할 때 신약과 구약을 함께 본다면 그만큼 이해가 더 쉽기 때문이다.
184. 성서의 말씀 선택
성서의 말씀 선택은 그리스도 생애의 사건을 인간입장에서 상기하고 기념함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이 하신 일을 마음에 느끼고 하느님으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는 데에 말씀의 전례의 중심이 있다. 그러므로 성서 중 그리스도의 생애의 한 사적과 가르침을 복음에서 택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미리 모방된 것을 구약성서에서 택하여 그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생활하였는가에 대한 사도의 가르침을 사도들의 서간에서 택하는 구조로 말씀의 순서는 이루어진다.
185. 성서의 배분
이렇게 택한 성서를 나누는 배분은 다음과 같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성서학, 전례신학 등의 전문가의 협조를 얻어 주일미사를 위한 3년 주기의 독서 배분을 작성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 이룩한 구원의 신비를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한 1년간의 교회력에 따라 배분한 것이다. 평일 미사는 주일미사의 성서 말씀과 병행하면서 2년을 주기<홀수 해․짝수 해>로 하여 배분되었다.
186. 성서 봉독.
전례에서 성서 봉독은 교회가 공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대면해서 봉독하도록 규정되어있다. 성서 봉독은 신자이면 누구나 할 수 있고 그 말씀에 그리스도가 현존하시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독서자가 미리 잘 준비하는 것이 좋으며 봉독에 있어서는 알려진 한에서 저자의 이름과 성서이름을 본문의 봉독에 앞서 밝힌다. 봉독 후 “주님의 말씀입니다”라고 독서자가 말하면 신자들은 “하느님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하게 되어 있으나 앵무새처럼 ‘하느님께 감사합니다’하거나 복사가 신자들을 대신해서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은 미사 마지막에 신자들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감사의 정을 정성 들여 노래함으로써 비로소 그 말은 전례 기도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이다.
187. 응송(應誦).
응송은 어려운 구약성서 봉독 후 이에 대답하는 것으로 말씀의 전례의 목표로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말로 대답하는 기도를 하는 것이며, 구약성서와 관련 있는 부분을 뽑아 하느님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며 구원 사업을 상기하며 기념하기 위한 것이고 이는 시나고가(=회당) 이래의 전통이다.
회당에서 율법서(모세오경)를 봉독하고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현재의 시조라 할 수 있는데, 로마 교회전례에서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발달함으로써 응송은 음악적으로 풍부한 선율로 발전하게되었지만 점점 더 어려워지며 일반인들은 부르기가 어려운 층계송(그라두알레)이 되었다. 지금은 '층계송'이라는 말 대신에 ‘응송’이라고 부른다.
188. 두 번째 부분(=신약독서)
사도 서간은 하느님 말씀을 어떻게 생활로 표현하는가를 사도들이 자신들이 복음의 씨를 뿌린 각 교회에 써보낸 편지인데 사제의 강론과 비슷하다. 성령(성신)께서는 사도의 강론 때, 하느님 말씀을 해설하려는 사제, 강론을 들으려는 모든 신자에게도 작용하신다.
189. 알렐루야와 복음 전(前) 노래
알렐루야<알렐루 야훼>라는 말은 ‘하느님을 찬양하라’라는 말로 사도 서간과 관계 있는 것은 아니다. 알렐루야 다음에 이어지는 복음 봉독에서 함께 하실 그리스도를 환영하는 것이다.
190. 신앙고백
성서 봉독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향하여 말씀을 건네는 것이지만, 신앙고백은 주님께 대한 우리의 대답과 같은 것이다. 이는 6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서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이것은 성찬의 전례에서 성체성사를 받기 전에 세례성사 때의 결심을 새롭게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다.
신앙고백의 기도문으로는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사도신경의 두 가지가 있는데 어떤 것을 하더라도 상관없다. 전자(前者)는 당시의 오류를 정정한 공의회의 결정을 반영하고 있으며, 후자(後者)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정리한 것이라고 한다.
191. 공동체<신자들>의 기도
신앙고백과 더불어 복음에 응답하는 기도로서 신앙에 따라 사는데 필요한 은혜를 청하는 기도가 공동체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개인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들의 공동체를 위하여 하는 기도이다. 기도할 때 넓은 공동체를 위한 기도를 먼저하고 자신들이 속해있는 공동체를 위한 지향을 드리도록 기도의 순서를 정한다. 신자 공동체 기도의 지향에 있어서 여러 자원의 공동체에 언급할 수 있도록 지향은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첫째 : 세계의 모든 교회를 위한 기도이다.
둘째 : 전 세계의 모든 민족, 국가, 각종 종교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평화나 구원을 기원하게 된다.
셋째 : 모든 차원을 위한 구체적이고 긴급한 일을 위하여 하는 기도이다.
넷째 : 우리의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한다.
신자들이 한마음이 되도록 기도를 위한 초대의 말과 끝맺는 기도는 집전 사제의 임무이다.
말씀의 전례에서 감사의 전례(성찬의 전례)로.
하느님 말씀에 대답하는 것은 말씀의 전례를 거쳐 감사의 전례로써 완성된다. 하느님의 말씀에 완전히 대답하기 위해서는 말[언(言)]의 기도만이 아니고 인간전체의 봉헌이 필요한데 이것은 그리스도자신의 봉헌에 의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제 3 장 성찬 전례
성찬의 전례의 뜻, 예물봉헌의식, 감사송 전구, 서창, 감사의 찬가, 성찬 기도 성립의 역사, 성찬 기도 제1양식, 성찬 기도 제2양식, 성찬 기도 제3양식, 성찬 기도 제4양식, 네 가지 성찬 기도와 앞으로의 전례
192. ‘성찬의 전례(감사의 전례)’의 뜻
미사전례는 말씀전례로 끝나지 않고, 자연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이어진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마음에서 솟아나는 감사의 감정, 찬미의 노래, 봉헌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마음에서 감사의 전례는 저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하느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가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선물이나 아름다운 찬미의 노래로써 표현하게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운 전례가 불가능하다.)
193. 예물봉헌(捧納, 또는 奉納 ) 의식.
성찬의 전례의 첫 부분은 봉헌의 준비이다. 봉헌 성가와 봉헌행렬, 빵과 포도주를 제단에 바치고 준비하는 일 ,손을 씻는 기도와 봉헌 기도까지가 성찬의 전례 제1부를 말한다.
우리가 제물을 제단으로 가져가고 사제는 집전자로서 그리스도의 대리자요, 교회의 대표자로서 신자들의 제물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공식적으로 제단에 바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받아들여져서 그리스도의 봉헌과 함께 하느님 아버지께 봉헌된다. ‘빵을 바치는 기도’는 구약 때부터 베라카(찬미)의 기도 전통에서 유래한 것으로 우리가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것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다음 포도주에 천연적인 산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봉헌함을 의미하는 의미로 한 방울의 물을 섞는다. 이어서 향을 사용할 수도 있다. 정결 기도를 바치고 봉헌하는 마음을 깨끗이 하여 받아들여지도록 하나의 상징으로서 손을 씻는다. 이어서 사제는 교우들을 <예물기도>에 초대한다.
194. 감사송 전구(서창전구:敍唱前句)
감사송 전의 이 대화구는 히폴리토의 사도 전승에 나타나 있다. 성찬의 전례에 앞서 감사송이 나오는데, 이것의 시작을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라는 집전 사제의 인사와 신자들의 “또한 사제와 함께 ”라는 대답의 감사송 전구를 한다. 이러한 신자들의 찬동에 고무되어 사제는 정성을 다하여 감사송 안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노래한다.
195. 감사송 (서창)
예전에는 ‘시작하다’의 의미로써 서(序)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집전 사제가 하느님 자신과 하느님 백성인 신자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사업을 진술한다는(이야기를 하는) 의미로서 서(敍)를 사용하고 있다.
성부여, 주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언제나 어디서나 아버지께 감사함이 참으로 마땅하고 옳은 일이며, 우리의 의무요 구원이로소이다. 주는 당신 말씀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 말씀을 우리에게 구세주로 보내시어, 성령(성신)의 힘으로 동정녀 몸에서 혈육을 취하여 나시게 하셨으며, 사람이 되신 그 말씀은 주의 뜻을 따라 거룩한 백성을 주께 모아 바치셨고. 십자가에 달려 수난 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을 보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천사들과 모든 성인들과 함께 주의 영광을 찬미하며, 소리 맞춰 노래하나이다. 여기는 하느님과 하느님 앞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실현된 하느님 나라의 구원의 역사가 진술되어 있고 성찬 기도문의 끝까지 관련되어 있다. 로마 전례에서는 교회력에 따라 구세사의 특징을 진술하게 되어 있다.
196. 감사의 찬가 <SANTUS, BENEDITUS>
감사송 다음에 오는 감사의 찬가는 이사야서 6,3과 마르코복음 11,9-11까지에서 취한 것인데 전반부는 약 6세기에, 후반부는 약 7세기에 첨가된 것이며 감사송과 성찬기도를 연결시키고 있다.
197. 성찬기도 성립의 역사
성찬기도는 시대가 흘러감에 따라 성문화(成文化)되고 고정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대략 3 세기경까지) 말씀의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충분히 음미한 후 하느님의 말씀에 대답하여 모든 것을 바치려는 기도가 성찬 기도가 되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잘된 기도문을 베끼거나 가르침을 받아 보존하게 되었고 후세까지 남게 되었다. 여기에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얼마나 많은 일을 해주셨는가를 천지 창조에서 시작하여 주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진 구세사 전체가 하느님의 자비의 표현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로마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해 온 로마 전문에 대한 존경에서 이것을 성찬 기도 제 1양식으로 하고 히폴리토의 아나포라<Anaphora:희랍정교회의 성찬식>로 불리는 3세기의 성찬 기도를 현대에 맞게 수정하여 제 2양식으로 하였다. 또 고대의 라틴 전례의 전통을 종합하여 새로운 성찬 기도가 작성되어 제 3양식이 되었고, 동방교회의 교부 바실리오의 아나포라에서 취해 간결하게 하나로 정리한 것을 제4양식으로 하였다.
198. 성찬 기도 제1양식은 로마식 전례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하던 것으로 라틴어로 미사를 지내는 15세기동안에 거의 변경되지 않았다. 이 기도문은 약 4세기 중엽부터 4세기말에 걸쳐 고정된 것 같다. 가장 오래된 로마 전례서 베로나의 전례서에는 267개의 감사송이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로마 전례에 속하는 사제들은 자신의 감사송을 작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감사송들 가운에 사제의 개인 신심에 치우친 것이라든지 중요한 사항을 주로 생각하지 않거나 주님의 가르침으로 볼 때 중요하지 않는 점을 강조하는 것들은 정통 신앙에서 벗어날 위험도 없지 않았으므로 그레고리오 교황 재위 때 그렇게 뛰어나지 않는 감사송은 제거하고 종래의 미사경본의 7가지 의 감사송으로 제한시켜 로마 전문으로 이어지게 하였다. 이리하여 완성된 것이 성찬 제 1양식이다. 여기에도 비교적 새로 첨가한 부분이 있다. 아마 각종의 개인적 신심, 그때 그 장소에 모인 사람들의 특별한 청원을 삽입하여 성립되었을 산사람들을 위한 기도와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그것이다.
199. 성찬기도 제2양식은 기원전 215년경의 유명한 로마 주교 히폴리토가 저술한 사도전승이란 책 가운데 이 기도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수록되어 있다. 이 주교는 성한 지고 중에 꼭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되는 요점을 적어두었다가 사제들에게 전해주려고 했는데 이것이 성찬 기도 제 2양식의 기원이 되었다. 요점을 적어두었기에 간결하여 현대인에게 적절하고 성찬 기도에 필요한 요소가 모두 들어 성찬기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보는데 자료가 되기도 한다.
200. 성찬 기도 제 3양식은 로마전문의 제 1양식의 특징을 살리고 부족한 점을 보충하여 로마전례의 성찬 기도로 완성시킨 것이다. 다시 말해 로마교회의 지금까지의 전통을 종합하여 그 신학적 내용을 풍부히 나타내려고 하였다. 제 1양식과 비슷하지만 신학적으로는 균형이 더 잘 잡힌 완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의 감사송은 그날의 전례에 고유한 것 이든가 아니면 교회력에 제시된 것을 사용해야 한다. 이 양식 중에서 특히 표현이 풍부한 대목에는 성부께 대한 부르짖음만이 아니고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서라는 말뿐 아니라 전례에서의 성령(성신)의 작용이 생명을 주고 거룩하게 만든다는 성화(聖化), 신화(神化)의 작용과 하나로 모은다는 일치, 사귐의 작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201. 성찬 기도 제 4양식은 동방교회의 전례를 이어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에서 생긴 전통을 이어받은 바실리오의 아나포라를 라틴어고 옮기고 문장을 다소 정리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방교회의 성찬기도는 매우 긴 반면<3시간정도> 로마의 기도는 짧은데 제 4양식은 다른 로마의 기도문보다 길다. 이 기도양식은 고유 감사송이 붙어 있는데 천지 창조에서 천사의 창조까지 나오고 있다. 여기까지를 감사송으로 하고 천사의 감사의 찬가가 이어지고 인류의 창조에서 시작되는 구원의 역사가 펼쳐지고 있다. 여기에서는 감사송에서 성찬기도까지 천지창조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로 이어지고 있어 다른 감사송을 사용하면 그 연결이 단절되므로 제4양식에서는 감사송을 다른 감사송과 바꿀 수 없게 되어 있는 특색이 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전례쇄신에서 미사의 제2양식으로 히폴리토의 아나포라를 거의 그대로 채용하게 되었다.
제 4 장 성찬 기도 내용과 구조의 비교
성부와 성자와 성령(성신) ,성사 제정문, 기념하고 봉헌한다, 기념송, 성령(성신)에 의해, 감사하고 봉헌한다,
하느님에 대한 봉사와 종말론적 증거, 공동체의 기도와 전구, 끝맺음과 영송
202. 네 가지의 성찬기도의 내용과 구조를 비교해보면 하느님의 구원사업의 서술은 감사송에서 시작하는데 각 양식이 약간씩 다르다. 일반적인 구원사업을 서술하고 있는 제2양식은 특히 강조하는 교의가 없어 제 3양식이나 제1양식에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
모든 성찬기도는 그 구조가 성부께로 향하여 있고 지금 바치는 것을 성스럽게 변화시켜 줄 것을 비는 구조로 되어 있다. 성찬기도의 시작은 먼저 주 하느님을 부르고 나서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과 성령(성신)을 기념한다.
그 다음 성변화로 넘어간다. 성변화로 넘어가는 과정이 제2양식은 아주 간단하지만 제1양식은 로마양식의 전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매우 길다. 예수님이 협조자를 보내신다고 약속하셨고 우리는 성령(성신)의 힘으로 무엇이나 할 수 있으므로 우리가 미사 전례에서 특히 성변화에서 성령(성신)의 작용을 빌고 있다.
성령(성신)의 힘을 청하는 기도는 중요한 요소이다 모든 성찬기도는 성부를 향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이 되도록 기도하는 점에서 같다.
203. 성사 제정문은 예수께서 당신의 수난과 죽음의 때가 온 것을 아시고 제자들과 과월절 식사를 하시며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의식을 제정하시고 빵과 포도주의 표지로써 새 계약의 봉헌 형식을 제정하셨는데 성찬 기도문은 네 가지 복음서와 바울로의 고린토 서간에 의거하고 있다. 성찬의 기도문과 그 발췌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4. 루가와 바울로에게서는‘감사하고’라는 말이나 마태오와 마르코에서 ‘축복하고’라는 말과, 또 어디에서나 사용하는 ‘나누어’라는 말은, 바울로 서간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제자들에게 주며’라는 말을 ‘받아먹으라’는 마태오와 바오로에서, 소위 성변화의 말씀인 ‘이것은 내 몸이다’, ‘그들에게 주시며’는 마태로와 마르코에서 ‘잔’이란 말은 루가와 바울로에서, 루가에서‘너희를 위하여’를 각각 취하였다. 로마 전문<1양식>은 분명 이 네 가지 성서의 부분에서 모든 말을 하나로 엮어 만든 것이다.
20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 전날 저녁에,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당신 손에 잔을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전능하신 천주 성부께 사례하신 후 축복하시어 ,당신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시며 말씀하셨나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너희와 모든 이의 죄사함을 위하여 흘릴 피니라. 너희는 이 예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
206.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의 영광으로 넘어간 구원사업의 중심인 빠스카를 우리는 미사의 중심인 성찬의 기도에서(모든 성찬 기도에서) 다시 생각하고 기념하고 있다. 제4양식에서는 특히 ‘봉헌하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단순한 기념이 아닌 주님의 빠스카 기념의식을 함께 지냄으로써 그리스도의 봉헌이 전례의 신비를 통해 현존하게 되고 우리자신도 봉헌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주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의 죽으심을 전하며 주의 부활하심을 굳세게 믿나이다에는 하느님의 나라가 끊임없이 내림하고 있다는 긴박감과 우리가 그 신앙에 살고, 죽으심을 전하며 부활하심을 찬양하면서 살겠다는 신앙이 나타나 있고 증거하고 있다.
위에서 말했듯이 성령(성신)의 작용은 중요한 것이다. 기도문 전체에서 성령(성신)의 작용을 두 번 청하고 있다. 먼저 성변화 전에 나오는 성령(성신)의 작용을 청하는 기도 때이다. 네 가지 기도문은 우리가 드리는 제물 (빵과 포도주)를 성령(성신)의 힘으로 거룩하게 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이 되게 기도하고 있다. 성변화를 위하여 성령(성신)의 힘을 비는 때 인 것이다. 다음은 영성체를 위해 성령(성신)에 의한 일치를 기원하는 때이다. 그리스도의 몸에 함께 참여하는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해주기를 기도하는 때인 것이다. 각각 성찬의 기도는 각기 강조점이 있으나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기념, 봉헌, 감사이고 여기에 덧붙여 하느님께 대한 봉사 ,하늘나라의 대망(大望), 그리스도의죽음을 전하는 선교와 선언과 같은 성격도 포함되어 있다. 그 다음 공동체의 기도와 전구를 한다.
207. 우선 널리 펴져 있는 교회와 주의 백성, 우리를 인도하시는 교황, 주교, 사제, 모든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있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부활의 희망을 가지고 죽은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함께 누리도록 기도한다. 짧은 기도로 성찬의 기도를 끝맺으면서 영송으로 이어진다.
208. 제 2양식에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를 찬미하고 주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하소서”라 하였으나 3,4양식에서는 “주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세상에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시니” 되어 있어 부활과 더불어 세상의 온갖 좋은 것을 다 주신다고 하며 마치고 있다. 이어서 영송이 있는데 각 위격의 고유한 작용을 상기시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성령(성신)과 더불어”라는 말은 성령(성신)은 성부와 성자의 나눔인데 성부, 성자, 성령(성신)이 삼위일체로서 하나의 위치에 놓고 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나눔 안에 받아들여져 동참하고 그리스도의 형제로서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모든 영예와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성령(성신)을 통하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 모든 신자가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이것과 더불어 교우들을 대표하려 사제가 한 신앙고백에 교우들의 찬동을 나타내는 외침인 ‘아멘’으로써 끝을 맺는다.
제 5 장 나눔의 의식(성찬식)
주님의 기도(전문, 본문, 부문), 교회를 위한 평화의 기도, 평화의 인사, 평화의 찬가, 영성체의 노래와 행렬,
영성체 전 신앙고백, 영성체 후 기도
209.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사제는 “주의 가르침을 지키고 말씀을 따르면서 삼가 주님의 기도를 바칩시다.”라고 하며 기도로 초대하지만 아버지를 떠난 탕자처럼 하느님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중개자이신 그리스도의 구원사업 덕분으로 감히 주님을 하느님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되었음을 알아야한다. 또 이것을 감사하고 주님의 기도를 소중히 여기며 주님의 자녀 되었음을 상기하면서 이 기도를 바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10. 주의 기도의 본문은 마태오 복음에서 취한 것으로 이 기도의 주제는‘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바라는 사상에 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에서 사용한 ‘이름’에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 ‘그 나라가 임하시며’라는 말이나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는 말과 같은 말이다. 주의 기도의 후반인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악에서 구하소서’의 네 가지는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하고 있다. 주님의 기도가 영성체 전에 바치게 된 것은 매일미사가 거행되기 훨씬 이전부터의 관습이다. 주일날 받은 영성체를 전부 영하지 않고 집에 가지고 가서 매일 아침 주의 기도를 바치고 영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잘못한 일을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면서 하느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주님의 기도가 끝나면 사제는 주님의 기도의 부문을 바친다. 하느님 아버지에게 향한 기도인 부문은 현재의 것은 최후의 기원인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말을 이어받아 그 사상을 부연한 것이다. 여기에 주의 기도 전체의 주제인 ‘하느님 나라가 임하시며’라는 사상을 첨가하였다. 이러한 하느님 나라를 바라는 종말론은 기대의 응답으로 “우리 주 천주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세세에 있나이다”하고 답한다. 여기 나라는 정치적인 국가를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하느님의 내세적인 나라라는 뜻도 담겨 있다.
211. 다음의 교회를 위한 평화의 기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님’로 시작되는 그리스도를 향해 교회를 위해 평화를 청하는 기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하며 평화를 약속하셨다. “우리 죄를 보지 마시고 오직 성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성교회로 하여금 주의 뜻대로 화목하여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라 하신 주의 약속으로 하느님이 교회에 평화와 일치를 주시도록 다시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212. 다음의 순서는 평화의 인사인데 본당의 교회 안에서 서로의 평화와 일치를 나타내고 확인하는 기도이며 인사이다. 사제는 그리스도가 현존하시고 지배하고 있음을 다시 상기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신자 상호간의 인사는 옛날에는 ‘신자들의 기도’라는 공동 기원 다음에 행하여 진 것으로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16,16)나 베드로 의 첫째 편지(5,14)에 나오는 “사랑의 입맞춤”이란 사상에서 유래한 것이다. 유스티노나 히폴리토에 의하면, 그것은 말씀의 전례를 끝맺는 기도의 ‘봉인’이며 성찬의 전례에 들어가기 전에 신자들만이 서로 교환하는 인사였다고 한다. 여기에는 서로를 용서하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평화의 인사가 영성체 전의 이 순서로 옮겨진 것은 그레고리오 1세 교황에 의해서였다.
213. “하느님의 어린양 ”으로 시작되는 평화의 찬가는 세르지오 1세에 의해 7세기 말경부터 미사에 도입된 찬가이다.“하느님의 어린양”은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했을 때 한 말인 것처럼 하느님의 아들을 부른 말이고 하느님의 아들을 찬미하게 하는 노래이다.
성체를 영하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영성체를 전후하여 모두 함께 노래하는 것으로 하느님께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에 의의가 있다. 행렬은 순번을 기다리기 위한 단순한 줄서기가 아니고 주의 만찬 석상에 동참하고 주의 부활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모두가 그러한 마음으로 즐겁게 함께 노래하고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성체전의 신앙고백은 성체를 보이며 묵시록(19,9) 에 나오는 “하느님 어린양의 식탁”이란 상징적인 요한의 말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완성 때의 영원한 잔치를 나타내는 주의 식탁으로 신자들을 초대한다.
214. 다음은 루가복음 7,6-7에서 백부장의 겸허(謙虛)한 신앙 고백을 인용하여 겸허한 신앙심을 일으키도록 되어 있다. 사제는 영성체 할 때 각 신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성변화의 말이 그 말 안에 포함되어있고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시고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겠다는 결의를 표명하는 행위이므로 신자는 “아멘”이라고 대답하면서 받아 모시는데 똑똑하게 “아멘”이라고 대답해야 하고 영성체 전의 “그리스도의 몸”과 “아멘”은 생략되어서는 안된다. 영성체가 끝난 다음 영성체 후 기도는 본기도나 봉헌기도와 같이 미사의 세 가지 공식기도의 하나로 나눔의 의식과 성찬의식 전체를 끝맺는 기도이다. 그 내용은 그 날의 그리스도 구원의 신비가 그리스도인에게 작용하여 우리들의 생활에 풍성한 결실을 맞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제 6 장 폐회식
215. 알림 ,파견의 축복과 폐회 인사
본래 교회라 함은 집회를 개최하는 예배 공동체이지 건물은 것이 아니었다. 폐회식은 사회로 향한다는 의미로서 공지사항을 통해 교회공동체를 위해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고 그밖에 필요한 뉴스, 활동보고, 당면한 과제들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그리스도고 신자로서 행동으로 여러 상황에서 주님을 증거 할 수 있다. 꼭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그러한 방법으로 복음 전파가 가능 한 것이다. 여기에 힘을 주기 위해서 폐회 인사에서도 폐회 선언의 말에 파견의 말이 덧붙여 있는 것이다.
제 7 장 미사를 노래로 하기
그레고리안 성가의 전통과 전례의 국어화(國語化) 대화구와 행동적 참가
216. 전례에 있어 감사의 의식을 거행할 때 노래하는 것은 찬미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다. 노래함으로써 말을 더 잘 표현하게 되고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서로에게 자극이 되며 신앙의 증거가 되어 일치를 나타내는 증거가 된다. 전례헌장 116조에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전통을 교회음악의 귀중한 유산으로 소중히 여기도록 권하고 있다. 그레고리안 성가의 가장 뛰어난 보편적 가치는 가사를 살리기 위한 선율이요 연주법이라는 사실에 있다. 가사의 내용이 살아나고 풍부히 표현되므로 깊이 음미하고 기도할 수 있게 되어있는 것이 장점이다. 신자들이 미사에 행동적으로 참가하기 위하여 신자들이 할 부분인 응송이나 답송을 노래로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주께서 여러분과 함께’ 같은 형식은 그리스도의 현존의식을 높이는 말이고 이에 답하는 신자들의 말인 “또한 사제와 함께”는 미사를 집전하는 사제 안에 그리스도가 현존하고 계시다는 신앙의 표현이 되었다. 사제는 신자들이 응답할 수 있도록 지도하고 성가대 가 모범을 보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기 도
217. 기도에 대하여 <예비자 교리서 36과 참조>
기도는 사람이 하느님의 은총(=성총)을 얻는 방법에서 찾아봐야 할 단계의 마지막입니다.
‘기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그 뜻을 알아보는 과정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세상 어떤 일도 마찬가지 아닌 것이 없겠지만, 기도라는 말의 뜻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갖습니다. 먼저 가장 정확한(?) 뜻부터 시작합니다. 기도는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대화’입니다. 흔히 대화란 보이는 사람끼리 오고가는, 드러나는 말을 통하여 자신의 뜻을 전달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알아듣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 사이에서 통하는 그런 방법으로 대화가 되질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도한다면서 내가 하고 싶은 ‘말 폭탄’을 잔뜩 쏟아내고 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굳이 기도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기도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매번 부모가 자식을 볼 때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구... 믿을 수 있겠니,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사실을...’하면서 확인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오고가는 말은 없어도 그 자체로서 아는 것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기도라고 하는 것도 이것과 비슷합니다.
218. (교리서 36과. 그리스도인과 기도생활부분)
진정한 가톨릭 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 지식을 우리가 많이 듣고 알고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보다는 ‘기도의 체험’을 더 많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대화이며 신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전자의 것(=신앙의 지식)은 인간의 말을 통한 설명이지만, 후자(=기도)는 우리가 직접 그 분의 뜻을 알아듣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공기(空氣)는 흔한 것이지만 없어서는 인간이 살 수 없듯이, 기도 역시도 신앙 생활을 영위하는데 마찬가지 의미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219. 예수님도 당신의 사명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기도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40일 동안 무엇을 했겠습니까?(마태오복음 4,1이하) 가끔씩은 먼동이 트긴 전에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셔서 기도하시기도 하셨다는(마르 1,35) 말씀이 성서에 나옵니다. 또한 기적을 하시기 전에도 기도하셨습니다.(마태 14,19; 14,23; 15,36). 최후만찬의 순간에도 빵을 당신의 몸으로, 포도주를 당신의 피로 만드는 예절을 거행할 때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26,27) 또한 인간의 입장이라면 피하고만 싶었을 수난의 순간에도 예수님은 기도하셨습니다(마태 26,42 - 아버지, 이것이 제가 마시지 않고는 치워질 수 없는 잔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이처럼 기도는 예수님의 생활과, 그리고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우리가 따로 떼어놓고 바라볼 수는 없는 아주 본질적인 것입니다.
220. 그러면 기도는 언제 해야 하는가? 위에서 이미 응답이 있은 질문이긴 합니다만, 성서에는 이 질문에 응답하는 곳이 있습니다. ‘언제나 기도하며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에페6,18)’. ‘늘 기도하십시오(1테살 5,17).’ 사람이 언제나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이런 말씀은 실천할 수 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마태 26,41)”하신 말씀대로 죄로 유인하는 유혹, 죄, 사랑의 실천을 필요로 할 때, 특별한 은총을 구해야 할 때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21. 이런 기도의 형식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의 형식에는 말로 하는 염경 기도, 겉으로 드러나는 말은 없지만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묵상기도, 묵상기도 중에서 마치 눈감고 영화를 보는 듯한 방법으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좀 더 고차원의 관상 기도 등의 종류가 있습니다. 참여하는 방법이 어렵지만 가장 탁월한 기도는 관상기도로 분류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몇 가지 융합<사도신경, 주의기도, 성모송, 영광송>으로 여러분에게 알려드린 묵주기도, 부활절을 앞두고 사순 시기에 하게되는 십자가의 길이 있습니다. 특히 뒤에 말씀드린,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는 염경 기도의 한 종류입니다.
222. 사람이 하는 행동에는 모름지기 목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막 다룬 ‘기도의 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합니다.
1. 흠숭 -- 절대자이신 하느님께 드리는 공경이며 찬미하는 행위이다.
2. 감사 -- 나의 존재와 여러 가지 은혜를 풍부히 베풀어주심에 감사를 드린다.
3. 용서를 청함 -- 생각, 말, 행동, 궐함으로 잘못한 죄에 대해 뉘우치며 용서를 비는 일.
4. 청원 --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아는 것처럼, 무조건 청하는 것만이 기도는 아니다.
223. 가장 완전한 기도: 주의기도 <마태오 복음 6,7-13>
교회의 전통적인 사항 한가지를 강조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는 기도 가운데서 가장 완벽한 기도는 무엇인지 묻는다면 응답은 있어야하겠죠. 그렇게 묻는다면, 제 1 순위를 차지하는 기도는 ‘주의기도’입니다. 이렇게 판단하는 것은 주의기도에 사용되는 말이 미사여구(美辭麗句)라서 하는 판단은 아닙니다. 가장 완전한 기도를 물었으니,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가장 잘 일치할 수 있는 기도라는 뜻입니다.
주의기도를 알려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인가? 성자라고 해서,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말에도 아버지의 아들이라 했으니, 그 뜻을 가장 잘 깨닫고 실천하신 분이기에 우리는 그분이 알려주신 기도를 완전이요, 완벽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주의기도의 내용구별을 해 보겠습니다.
첫 부분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찬미입니다.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둘째 부분은 인간에 대한 것입니다 --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영광은 하느님을 향하여 봉헌하고, 우리가 먹고사는 양식마저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가 용서받고 사랑받기를 바라는 그만큼 하느님을 통하여 이웃을 먼저 사랑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지킬 계명 편
224.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의무 때문만은 아닙니다. 바꿔 이야기하면, 우리가 사는 것이 의무라고 한다면, 많은 분들이 제대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사는 것은 권리입니다. 물론 살아가는 방법을 우리가 어떤 것을 택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긴 합니다. 이제 삶을 효율적으로 지내는 방법에 관련되며, 동시에 신앙인으로 지켜야 할 최소한의 본보기, 삶의 규정에 대해 말씀드릴 차례입니다. 그것을 ‘지킬 계명’으로 분류하겠습니다. 이 지킬 계명의 부분에는 ‘십계명2)’의 실천과 ‘교회법에서 정한대로 실천해야 할 규정이나 법’이 있습니다.
225. ‘사랑하는 일’을 여러분들은 의무라고 생각하십니까? 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대답하시더라도 틀리는 응답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어떤 과정을 선택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맺을 삶의 열매는 달라집니다. 똑같은 일이라고 하더라도 의무로 하는 일과 기쁨과 선택에 의해서 하는 일에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말씀드리는 계명에 대한 것도 그렇게 알아들으시기를 바랍니다.
226. <계명을 이야기하기 위한 두 가지 예화>
① 어떤 사람이 신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신부와 함께 가던 중 십계명에 대해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기를, “신부님, 저는 십계명이 싫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왜 그리도 ‘무엇하지 말라’는 명령이 많습니까? 귀찮아 죽겠습니다.
신부는 그 사람의 얘기에 어떻게 응답해야 할지 몰라 암담해 하면서 말없이 운전만 하였다. 그러던 중 그들이 타고 가던 차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곳, 이정표가 서 있는 곳에 도착하였다. 동쪽은 어디로 가고, 서쪽은 어디로 간다는 이정표를 바라보고 있던 신부는 핸들을 그들이 가야 할 방향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꺾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그 사람이 놀라면서 소리를 질렀다. “아니, 신부님, 어디로 가십니까? 이쪽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신부님은 반대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자 신부가 대답하였다. “이 사람아! 오른쪽으로 가라, 왼쪽으로 가라하는 이정표는 귀찮아 죽겠네. 어디로 가면 어떤가. 그냥 내 마음대로 가게 내버려두게나”
② 한번은 어떤 사제가 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십계명에 대해서 아주 강하게 말하였다. 강론이 끝나고 나서 한 신자가 그 사제에게 찾아와 말하였다. “오늘 하신 십계명에 대한 강론은 너무 솔직하고 강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젊은 아이들이 교회에 잘 나오려 하지 않는데, 이제는 더 멀리할 것 같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십계명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렇게까지 강조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이러한 충고를 들은 사제는 일어나서 어딘가에 가더니 ‘극약’이라 써 붙인 약병을 들고 왔다. 그는 그 신자에게 약병을 들어 보여주며 말하기를, “제가 이 병에 붙어있는 ‘극약’이란 딱지를 떼어버리고 ‘꿀’이라고 써 붙이면 어떨까요? 그러면 더 위험할까요? 아니면 덜 위험할까요?”
227. 여러분에게 이 예화를 들려드린 것은, 아직 여러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시는 분이지 제가 알지는 못하지만, 자칫 왜곡되게 생각하면 경직되게 알아듣고 멀리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실 분도 있을 것 같아 어느 강연 테이프의 녹음에서 풀어쓴 것을 옮긴 것입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계명이라는 것을 그렇게 지나치게 경직된 모습으로 말로, 나의 삶의 의지를 꺾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의미도 담고 있는 것입니다.
228. 성서에 나오는 십계명 순서 (출애굽기 20,1-7; 신명기 5,1-22)
① 나 야훼는 너의 하느님이시다. 내 앞에서 (내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② 너는 우상을 만들지 말라.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섬기지 말라.
③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④ 너희는 6일 동안 힘써 일한 뒤 안식일을 기억하고 거룩히 지내라.
⑤ 부모를 공경하여라.
⑥ 사람을 죽이지 말라.
⑦ 간음하지 말라.
⑧ 도둑질을 하지 말라.
⑨ 네 이웃에게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
⑩ 네 이웃의 소유물들, 아내와 가축들, 그 외 재산들을 탐내지 말라.
229. 우리가 알로 있는 십계명 : 주요 기도문에 나오는 순서
①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②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아라.
③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④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⑤ 사람을 죽이지 말아라. ⑥ 간음하지 말아라.
⑦ 도둑질을 하지 말아라. ⑧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⑨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아라. ⑩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아라.
AUGUSTINUS 성인의 배열에 따른 것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십계명이다. 이 성인의 배열은 여성에 대한 존중을 드러내고 있다. 남성 중심의 유다 문화에서 여자는 집이나 가축들과 같이 남자의 재물로써 취급되고 있는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 10번째 계명에 나타난 여성과 재물을 갈라놓는다. 하지만, 이 예비자 교리에서 말하는 십계명의 순서는 성서에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접하기 쉬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분류법을 따르겠습니다.
230. 십계명의 내용은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커다란 제목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흔히 알아듣듯이 계명이기에 우리 사람의 생활이나 환경을 제한하고 억압하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본래 주어질 때의 목적과 어긋나게 됩니다. 그것은 잘못 해석하면, ‘세상 사물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내 맘대로 해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겠다’는 것이니 문제 있는 자세밖에 다른 것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제대로 살아가려면 지켜야 할 규정과 내용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권리를 누리고 살려면 의무에 대한 것도 제대로 살펴보고 지켜야 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231. 이 기도문, 천주께서 인간에게 내려주신 계명이라는 의미로 천주십계(天主十戒)라 부른다. 이 기도문의 원형은 구약시대,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야훼 하느님으로부터 삶의 지침을 받은데서 기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집트인들을 뒤로하고 홍해를 건너고 나서 3개월이 지난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산에 이르른다. 그리고 모세는 시나이 산 위로 올라가서 하느님을 만나고 당신의 정신을 담은 계명을 두 개의 돌판에 새겨서 돌아온다(출애굽기 20장). 이렇게 되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3개월만에 하느님의 선택과 사랑에서 벗어나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하던 때였다.
이 십계명에 대한 최소한의 준수야말로 하느님의 은총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다. 그것만 지키면 더 이상 아무 것도 지킬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너무 소극적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해석하는 것이다.
232. 십계명의 목적 - 내용구별
사람을 가리켜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만 움직이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신앙인으로서 구원의 길을 향하여 나아가는 한가지 방법으로 십계명을 생각할 수도 있다. 십계명의 준수가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지만, 사도신경에 나오는 그 믿음과 그 믿음의 고백과 더불어서 삶의 지침이 될 수는 있습니다. 이 십계명은 하느님을 사랑하고[敬天], 다른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愛人] 최소한도로 지켜야 할 규범이요, 가장 기본적인 규율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계명은 신앙에 대한 규범이요, 다른 인간을 향한 계명은 윤리도덕에 대한 규범입니다. 십계명의 처음 세 가지는 하느님에 관련된 것이고, 다음 일곱 가지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당연히 우리가 알아차려야 할 사항 한가지는 이것입니다. 신앙에 대한 계명이 인간 윤리에 대한 계명보다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이 윤리나 도덕에 앞서 있는 것은 신앙이 없이는 윤리와 도덕이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33. 인간의 자유를 위해 주어진 계명
하느님은 당신의 십계명에서 긍정적 표현보다는 부정적 표현을 많이 쓰고 계신다. 제 1 계명, 제 3 계명, 제 4 계명을 빼고는 다 “무엇하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 말라’는 계명을 앞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가 억압되고 억지로 해야 한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실상은 그것이 아니다. ‘..을 하여라’는 말씀보다 ‘..무엇하지 말라’는 하느님 말씀은 우리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시는 계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정적인 명령은 긍정적인 명령보다 제한사항이 적다. 에덴동산에서 하느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계명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에덴 동산에 있는 과실나무 중 어느 과실이든지 먹을 수 있지만 동산 한가운데 있는 선악과나무의 과실만은 먹어서는 안된다고 부정적 명령을 내리신다(창세기 2,16-17). 만약 하느님이 이 부정적 명령대신에 긍정적 명령을 주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담과 하와에게 다음처럼 명령했다고 하자. “너희들은 동산 북서쪽 모퉁이에 있는 나무들로부터 시작하여 동산 외곽을 쭉 따라가면서 서 있는 나무들의 과실을 차례로 따먹을지라.” 이 명령은 부정적 명령보다 자유를 덜 허락하는 것이다. 또 다른 예로, ‘간음하지 말라’는 부정적 계명대신에 “너는 일주일에 두 번 배우자와 성행위를 할 지니, 밤 9시부터 11시 사이에만 할지니라”고 했다면 그 계명은 인간의 자유를 더 많이 제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 백성을 위한 원초적 생활률인 십계명이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고 있다면, 그 외 다른 규범과 규율들도 인간의 자유가 바르게 행사될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을 필요가 있다.
234. 하느님 사랑에 대한 계명 세 가지
: 인간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하느님을 올바른 마음과 자세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 처음 세 가지, 하느님에 대한 계명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삶의 정신이다.
235. 제 1계명 ; 나 야훼는 너의 하느님이시다. 내 앞에서 (내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제 1 계명은 다음에 나오는 모든 계명의 기본이 되는 계명이다. 즉 으뜸 계명이라는 소리이다. 출애굽기 20,3과 신명기 5,7에 나오는 히브리말은 두 가지 표현으로 번역할 수 있다. ‘①너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 ②너는 내 밖에 있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로 번역할 수 있다.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로 번역하면,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그 신들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신학적으로는 단일신(單一神)론을 내포한다. ‘내 밖에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로 번역하면, 하느님 이외에는 다른 신들이 없다는 의미로서 이 경우는 신학적으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내포한다. 어떠한 번역이든 야훼 하느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강조점은 같다.
236. 이 첫 번째 계명은 어떻게 하라는 것인가?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면 끝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의 일차적인 의미는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알아모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대접해드린다는 것이다. 강조점이 제사나 기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바르게 아는 것이다.
앎이 다르면 섬김도 다르고, 섬김이 다르면 그 섬김의 결과도 다르다. 즉 사랑의 하느님으로 알고 섬기는지, 심판의 하느님으로 알고 섬기는지, 필요할 때 우리가 기도하는 구원군으로 알고 섬기는지 그에 따라서 삶에 나타나는 결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237. 하느님을 심판의 하느님으로 알면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들은 하느님의 심판이 무서워서 지키는 꼴이 된다. 하느님을 그때 그때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구원(救援)군(軍)으로 생각한다면 필요한 시간에만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들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의 하느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나머지 아홉 가지 계명을 지킨다. 판관기 11장에 나오는 ‘입다’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른 채 엉뚱한 방향에서 하느님을 섬기려 한 사람이다. 근 하느님께서 시키지도 않은 맹세를 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하기를 청한다. ‘입다’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하느님을 섬길 때 중요한 것은 제사나 기도가 아니라 하느님을 바르게 알아보고 섬기는 것이다.
238. 우리가 하느님을 알아모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알아모신다는 상호 전인적인 섬김을 내포한다.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계명 앞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우리편에서만 하느님 섬김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편에서도 우리게 대한 섬김이 있다는 것이다. 세상과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섬기시는지 모른다 하느님은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우리의 불충실성에 대하여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섬기신다는 말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태 20,28; 마르코 10,45)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많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다.
239. 제 2 계명 ;
“너는 야훼, 너의 하느님 이름을 헛되이 부르지 말라, 이는 하느님께서 그 이름을 헛되이 부르는 자를 죄없다 하지 않기 때문이다”(출애굽기 20,7; 신명 5,11)
우리 나라의 욕설은 대개 성적인 것과 관련이 있지만, 그리스도교 국가인 미국이나 유럽은 하느님과 관련되어 있다. 즉 ‘GOD DAMM<비난하다. 지옥에 떨어뜨리다>--->GOD DAMM YOU=빌어먹을자식, 뒈져버려라' 그렇다고 한다면, 제 2 계명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들먹거리면서 쌍욕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
이 계명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이름은 그 이름을 소유한 존재와 본질적인 연결을 가지며, 소유한자의 특성을 드러낸다. 우리가 누구를 알고 사귀려면 이름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이름을 모르고서는 깊은 관계를 가질 수 없다. 신을 섬길 때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항상 ‘야훼의 이름으로’ 복을 선언하였다. 사제들도 ‘야훼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주었다(신명10,8)’. 인간에게 복을 빌어주는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하느님의 이름은 하느님 자신을 가리킨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많은 이들이 자기의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들먹인다. 이것이 지나치면 인간이 신의 이름을 남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의 본질은 그 이름을 남용하지 말라는 것이다.
<존귀한 일에 대하여 정성어린 태도를 말하는 데, 맹세를 할 때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뜻도 담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훗날 이 계명을 지나치게 해석하여, ‘야훼’라 써 놓고 계명준수 차원에서 ‘아도나이’라고 불렀다. >
240. 제 3 계명 ;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켜라.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앞에서 쉬어라이 안식일 계명은 두 가지 요소가 합쳐져 있다. ① 엿새동안 열과 성을 다해서 생업에 종사하고 ② 그리고 나서 안식일 날 주님을 찬미하면서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삶에서 최선을 다한 다음에 쉬라는 요구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엿새동안 내내 놀다가 칠일째 되는 날도 다시 논다면 그는 안식일 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제대로 지키려면 먼저 주간(週刊)동안 열심히 살아야 한다.
241. 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날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한 날이다. 안식일은 하느님의 날이니 거룩하게 지킬 것을 명하신다. 안식일은 쉼[휴식(休息)]의 날이다. 쉼을 통해서 하느님이 허락하신 축복과 생명을 받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400년간 노예생활을 통해서 쉬지 못했다. 이 쉼은 하느님의 해방에 의한 선물인 것이다.
242. 우리가 삶에서 쉬지 않고 정신없이 일할 때, 우리 몸은 우리에게 반역을 일으킨다. 과로로 인한 긴장으로 집중력이 떨어지고 초조하게 된다. 숨돌릴 시간도 없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것은 위대한 행위가 아니라 무지막지한 바보스런 짓이다. 주님께서 주신 생의 목적은 즐김과 보람이 함께하는 것이지 녹초가 되기까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다. 쉼이 있어야 목표도 더 빨리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43. 한 주간 중 하루를 쉰다는 것은 아주 작은 일처럼 보일지는 몰라도 사실은 우리 생명을 보존하고 수령하는 데 꼭 필수적이고 중요한 행위이다. 하느님이 안식일에 쉬라고 한 것은 인간의 육체적 건강과 영혼의 성숙을 위해서이다. 주일날은 공일날이 아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주일날 하느님을 예배한다는 것을 미사 한 대만 드리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미사 한 대 드리고 나서 그 날이 주일인지 평일인지 모른다는 듯이 정신없이 놀러 다니거나 일하러 간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일은 거룩한 날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공휴일’이다. 이들은 미사한대 드림으로써 나머지 시간들은 온통 자기 자신을 위한 휴식시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한다. 주일이란 주님의 날이다. 주일은 한 시간만이 주일이 아니라, 24시간 내내 다 주일이다. 그러므로 나머지 시간동안 세속의 일에 정신이 팔려서는 안된다.
244. 우리 신앙인들은 왜 안식일[=토요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키는가? 바오로 사도는 자기가 전한 복음을 듣고 신자가 된 이방인들에게 안식일 준수를 명하기보다는 주간의 첫날[=주일]을 기념하도록 하였다. 예수님도 안식일 다음날 새벽에 부활하셨다(마태 28,1). 안식일 다음날 우리는 주의 만찬을 나누려고 한자리에 모였다.(사도행전 20,7) 토마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뵌 날도 부활 다음주간 첫날(=부활2주일)이었다. 그리하여 한 주간의 첫날은 주일이 된 것이다. 달력을 보아도 주일이 가장 앞에 있지 않은가? 초대교회 공동체의 일원인 성 이냐시오는 “더 이상 안식일을 위해 살지 아니하고, 주일날을 위해서 살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245. 그렇다면 먹고살기 위해 주일에 일을 해야만 하는 경우는 어떠한가? 구약성서 출애굽기 31,14에 나오는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한 명령이 있다. 그런데 역사배경에 따르면, 이 계명은 바빌론 유배 후기에 나온 계명이다. 이 당시 계명은 엄격성을 띠게 되는데, 그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 예배가 불가능한 정치 종교적 상황에서 유대인이 유대인으로서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율법준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출애 31,14의 계명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민족전체에게 주어진 계명인 것이며, 국가 차원에서 그렇게 되도록 해야 할 임무를 배려해야 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주일에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목적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일상생활을 성화하고 동포의식과 형제적 일치를 촉진하는데 있다’
246. <인간이 쉴 때조차도 하느님을 먼저 생각하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라는 삶의 요구이다. 주일미사를 빠지고 빠지지 않는 것과 그 비율에 따라서 거룩한 생활을 했다 못했다가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 사랑에 대한 계명
247. 제 4 계명 ; 부모에게 효도하라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주 하느님이 주신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출애굽기 20,12)’ ‘너는 네 부모가 늙었을 때 보살피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슬프게 하지 말아라. 부모가 설혹 노망을 부린다고 하더라도 잘 참아내고 네가 젊고 힘있다고 해서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아라(집회서 3,12-13)’
이러한 계명이 요즘 시대에 들어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시대가 바뀐 탓일까? 별로 강조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바뀌지 않을 인간의 도리(道理)는 있는 법이다. 인간 도덕의 근본은 부모에 대한 공경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하늘에 순응하는 자는 흥하고 역행하는 자는 망한다[순천자흥, 역천자망 --- 順天子興 逆天子亡]
창세기 9장에 나오는 노아의 후손은 셈, 함, 야벳이다. 둘째아들 함이 아버지의 벗은 몸을 보고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두 형제에게 말을 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후에 술이 깬 노아는 함이 한 일을 전해듣고 그 아들에게 저주를 선언한다. 또한 야곱은 에사오보다 뒤늦게 태어나서 상속권을 놓친 사람으로 나온다.(창세기 25장이후) 그는 상속권에 대한 집착으로 훗날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권 축복을 가로채는 잘못을 범하고 만다.(창세기 27장) 그 결과 집을 떠나 20년간을 방랑생활을 한다. 그는 살아있을 때 그를 극진히 사랑해주었던 어머니 리브가를 살아서는 보지 못한다. 또한 야곱은 그의 자식 요셉을 사랑하였는데 다른 형제들이 질투하여 요셉을 이집트로 팔아버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형제들은 요셉이 짐승에게 물어 뜯겨 죽었다고 아버지에게 거짓 보고까지 한다(37장). 아버지를 속이며 축복을 빼앗았던 것처럼 그가 똑같이 자식들로부터 속는 것이다.
성서에 나오는 이러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부모님에 대하여 어떤 마음 자세를 갖고 대하고 공경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248. <자녀가 부모에 대한 계명과 더불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 역시도 중요시함을 가리킨다. >
249. 제 5 계명 ; 사람을 죽이지 말라.
살인하지 못한다(출애 20,13; 신명 5,17)는 계명의 근거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창세기 9,6에 보면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모상]으로 만들어졌으니 남의 피를 흘리는 사람은 제 피도 흘리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인간 생명의 주인은 하느님이시고, 인간 생명은 하느님의 모상안에서 만들어졌기에 그 누구도 자기 멋대로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없다. 또한 자기가 자기 생명을 죽여도 안된다. 생명자체는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누군가를 죽인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살인에 대한 책임을 묻는다. 민수기 35,33에 따르면, ‘땅에 흘려진 피는 그 피를 흘리도록 만든 사람의 피가 아니고서는 그 원한을 갚을 길이 없다’고 했다.
250. ‘살인하지 말라’는 제 5 계명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다면, 우리 중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계명을 어기지 않고 하느님 앞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 과연 몇 사람이나 살인을 저지르며 살겠는가? 하지만 하느님이 주신 이 계명의 본뜻은 우리가 ‘생명을 돌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의 적극적 의미는 ‘생명을 돌보아야 한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살인뿐 아니라 남에게 성[怒-성낼 노]을 내고 남을 미워하는 것도 살인으로 간주하신다(마태오 5,21-22). 예수님께서 이렇게 살인 금령을 부연하여 폭넓게 해석하시는 것은 미움이 궁극적으로는 생명을 죽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제 5 계명은 ‘생명을 돌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적극적인 계명으로 바꾸어 이해하는 것이 좋다. 우리가 이기적인 동기에서이든 무관심에서든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살면 된다는 태도를 갖는다면 그것은 일종의 살인행위이다.
251. <생명보호에 대한 것이다. 타인에 대한 생명만큼이나, 자신에 대한 생명의 중요성도 함께 깨달아야 한다. >
252. 제 6 계명 + 제 9 계명 ; 간음하지 말라. + ‘다른 사람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
프로이드는 사람들이 평소 생각하는 것 중의 90%가 성(性, sex)에 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이론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별개로 치더라도 성(性)은 우리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성에서 오는 윤리적 타락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다윗, 솔로몬, 야곱, 삼손등 성서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 대다수가 성적 타락을 맛본 사람들이다. 누구나 주어진 상황과 조건에 따라서 원초적이고 충동적인 본능이 솟구쳐 나오면 윤리적으로 넘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 6 계명은 지키기 힘든 계명이다.
성적인 유혹이나 성적인 충동을 미리 예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다. 성적인 유혹은 갑자기 우리를 덮친다. 다윗이 바쎄바를 향한 욕정을 참지 못한 것은 미리 계획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다. 저녁나절 궁전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바쎄바를 보고 나서 갑자기 유혹이 밀려 온 것이다. 성적인 유혹을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이 본능적 욕구를 건드리기에 그렇다.
253. 인간의 본능적 욕구는 일단 일어나면 그것이 채워지기 전에는 좀체 꺼지지 않는 특성이 있다. 본능적 욕구는 부끄러움도 위험에 대한 경계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욕망이 채워진 다음에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되고 안전에 대해 생각하고 부끄러워하게 된다. 마치 목이 마르면 물을 먹어야만 갈증에 대한 욕구가 사라지듯이 성욕도 그렇다. 성적인 유혹은 극복하기에는 힘겹고 어려운 유혹이지만 그 유혹을 따라가느냐 아니면 물리치느냐 하는 선택은 여전히 우리에게 달려있다. 우리에게 달려있기에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인 것이다.
254. 성적인 욕구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순결의 사나이라고 말하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요셉을 통해서 알아보자.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구약의 성조 ‘요셉의 경우’를 보자. 이집트 경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향하여 성적 욕망을 느끼면서 팔을 붙잡으면서까지 관계를 맺자고 유혹해올 때, 요셉의 첫 번째 응답은 ‘싫습니다’였다. 그의 두 번째 행동은 겉옷을 유혹자의 손에 내맡기고(창세기 39,12-13) 도망치는 일이었다. 이것이 최선의 길이다.
우리가 살면서 유혹을 받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유혹이란 본능적인 욕구가 건드려지면 언제든지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밀려온 유혹에 굴복하여 죄를 짓게 될 때 잘못하는 것이다. 유혹 앞에서 ‘싫습니다’라고 하면서 등을 보이고 도망치지 못하면 그 책임은 유혹자의 책임이 아니라, 우리의 책임이 되는 것이다.
255. <제6 계명 - 남녀간의 성적관계를 규정하는 계명이다. 상호간의 정조(貞操)를 보호하는 계명에 대한 것이다. 동성애, 혼인이외의 경우에 대한 것, 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런 행동이나 마음의 방향을 변화시키는 것도 함께 금지하는 것(?)이다.>
<9계명 - 제 6계명의 바탕이 되는 마음까지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과거에 행한 잘못된 행동의 즐거운(?) 반성(=회상)도 금지하는 것이다.>
256. 제 7 계명 + 제 8 계명 + 제 10 계명 ;
도둑질을 하지 말라. +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 +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
이 세 가지 금령은 인간에게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살지 말라는 계명을 담고 있기에 함께 이야기합니다. 도둑질, 거짓증언, 남의 재물을 탐내는 것은 한마디로 진실하지 못한 삶을 사는 것이다. 병든 우리 사회를 치유하기 위한 방법이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부정부패와 한탕주의에 물들어 이 계명들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지낸다. 이것은 빛과 소금을 자처하는 교회가 병들었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위선과 거짓말이 판을 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지도자와 개개인이 진실되게 살지 못함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교회[=그리스도교회]의 부패상의 대표적인 것은 가짜 박사[=신학박사]가 가장 많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많은 목회자들이 박사들이다. 특히 신학박사들이다. 위선과 거짓으로 가득찬 모습이니, 나라가 이런 모양으로 갈 수 밖에. 우리도 잘못 산다면, 이름만으로 산다는 것이고 그것은 또 다른 예수쟁이만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바닷물의 염도는 1.4%라고 한다. 이 염도가 대양(大洋)의 물이 썩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의 그리스챤은 40%가량이라고 한다.
<7계명- 재산과 재산권에 대한 것이다.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고자 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더불어 자기의 재산에 대한 올바른 사용도 권하는 것이다.>
<8계명 - 명예를 보호하는 계명이다. 남을 죽을 죄인으로 몰지 말라는 것이다. 성서에서 통하는 것은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면, 그대로 일이 시행되던 관습이 있었는데, 이의 남용도 금지하는 것이다(참조. 다니엘서-수산나와 다니엘)>
<10계명 - 제 7계명의 바탕이 되는 마음도 금지하는 것이다. 내가 정상적이지 못하거나 남에게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금지하는 것이다. >
257. 계명정리
십계명을 가장 잘 정리한 분은 예수님이다. 율법학자가 으뜸가는 계명을 물었을 때, ‘이스라엘아 들으라. 네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주 하느님을 사랑하라’. 둘째 계명은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간략하게 정리하신다.
예수님은 이렇게 계명을 정리하면서, 1-3계명은 위의 경우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고, 4-10은 인간에 대한 것이다. 즉, 경천애인(敬天愛人)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순서는 명확하다. 하느님 사랑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라. 그래야만 그 다음에 인간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순서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 어느 것도 완성되지 못한다. 한가지 더 강조할 것은, 십계명을 율법주의자로서 지키려면 지키지 않는 것만도 못하다. 문자에 매어서 지키는 것은 하느님 보시기에 자랑스러울까? 인간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완벽하게 했다고 자랑할 수있을지는 몰라도 하느님 보시기에도 과연 그러할까?
십계명을 지키는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를 갖게 하려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킨 다음에 계명을 주셨다. 자유인으로 만든 다음, 그 자유를 삶에서 융화시켜 나가라는 의미에서 주신 것이 십계명이다.
교회법에서 말하는 계명
258. 교회법에서 규정한 6가지 계명... (교리서 44과. 202면-204면)
현행 교회법은 1983년 11월 27일부터 발효된 ‘요한 바오로 2세 법전’이라 한다. 교회법은 인간 사이의 구체적인 과정들을 제시하고 해석하는 것은 아니기에 신법(神法)이라 하기도 하고, 자연법(自然法)이라고도 한다. 이 교회법은 1752개조의 항목이 있는데, 이 가운데서 삶의 의무규정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법의 목적은 애초에 삶을 제한하고 규정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특정하게 일어날 수 있는 일 들을 규정지어서 더 많은 구성원들이 그 일로 인하여 입을 수 있는 피해를 방지하고자 하는데 더 큰 목적과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법에 언급된 신자들이 지켜야 할 의무규정 역시도 같은 비중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씀드립니다.
259. ① 모든 주일과 대축일에 미사에 참여한다. : 1247조
<신자들은 주일과 그 밖의 의무축일에 미사에 참여할 의무가 있다. 또한 하느님께 바쳐야 할 경배, 주님의 날의 고유한 기쁨 또는 마음과 몸의 합당한 휴식을 방해하는 일과 영업을 삼가야 한다.>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 이 규정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들이 어렵다고들 합니다. 자유롭게 내 맘대로 신앙 생활을 하게 하면 되지 왜 의무로 삶을 옭아매는지 묻습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인간의 생활과 하느님의 관계는 뗄 수 없는 사이였습니다. 신정일치(神政一致)의 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하느님의 법을 알려줌으로써 인간의 생활이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는데 이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주기적으로 하느님의 뜻에 비추어 본 삶을 다짐한다면 그만큼 잘못 흐를 수 있는 인생의 길도 방어된다고 하는 게 바를 수도 있습니다.
260. ② 정한 날에 금육과 단식을 한다. : 1251조, 1252조
<1251조 : 연중 모든 금요일에는 대축일들 중의 어느 날과 겹치지 아니하는 한 육식 또는 주교회의의 규정에 따른 음식을 자제하는 금육제가 지켜져야 한다. 재의 수요일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신 성금요일에는 금육재와 금식재가 지켜져야 한다>
<1252조 : 14세를 만료한 자들은 금육재의 법률을 지켜야 하고 모든 성년자들은 60세의 시초까지 금식재의 법률을 지켜야 한다......>
의미는, 고기를 먹지 않는 일과 편의에 규정된 한끼를 먹지 않는 것에 대한 규정입니다. 서양의 입장에서 이 법이 만들어졌으니, 금육은 ‘주식(主食)인 고기’를 먹지 않는 것입니다. 1년 내내 매주 금요일마다 실시합니다. 대축일이라든가 민족 고유의 축제에 따라서는 이 규정이 용인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1년 52주 동안 약 45회 정도 지킬 수 있는 규정의 한 가지입니다.
단식은 1년에 두 번이 있습니다. 사순절이 시작되는 첫날인 수요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이 세상에 하직인사를 하신 수난 성금요일이 그 두 날입니다. 보통은 이 두 날에 단식을 하고 그 몫을 금전(金錢)으로 환산하여 나 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도록 봉헌하기를 권고합니다.
261. <이슬람교에서는 라마단 단식일 때, 해가 뜨면 다시 해가 질 때까지 물도 먹지 못하게 하는 규정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로지 그들의 신 알라를 기억하며 기도하도록 권합니다. 이것에 비교하면 가톨릭의 규정은 상당히 현실과 타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262. ③ 적어도 1년에 한번, 고해성사를 받는다. : 989조
<모든 신자는 사리를 분별할 나이에 이른 후 매년 적어도 한번 자기의 중죄를 성실히 고백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세계 교회법에 의한 것이고, 한국인들에게 적용되는 한국지역 교회법에는 두 번을 권장합니다. 물론 의무는 아닙니다. 이름하여, 판공성사라 이름하고, 그 시행을 위해서는 여러분의 교적이 있는 본당에서 ‘성사표’가 발행됩니다. 물론 성사를 하면서 이렇게 나누어드린 표를 회수합니다. 성사표를 회수한 다음에는 여러분의 교적에 개별적으로 기록합니다. 신앙생활을 최소한의 규정에 따라서 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방법이며, 계속하여 3년 정도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냉담(冷淡)신자로 구별하여, 별도관리합니다.
여러분이 사시는 곳을 달리하여 이사하실 때에는 교적도 가까운 본당으로 옮겨가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계속하여 성사표는 발행이 되지만 같은 사람이 해당 주소에 살지 않을 때는 냉담자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사가신 주소에서 신앙생활을 빠짐없이 하더라도 어쩔 수없이 나타나는 현상중의 한가지가 될 수 있습니다.
263. ④ 적어도 1년에 한번, 성체성사를 한다. : 920조
<1항 :모든 신자는 지성한 성찬을 영하기 시작한 다음에는 매년 적어도 한번 성체를 영할 의무가 있다>
<2항 : 이 계명은 부활시기에 이행하여야 한다. 다만 정당한 이유가 있으면 연내 다른 시기에 수행하여야 한다>
이것도 세계 교회법에 의한 것이고, 한국인들에게 적용되는 한국지역 교회법에는 2항의 내용에 차이가 있습니다. 부활시기때만이 아니라, 사순절 재의 수요일부터 삼위일체 대축일까지입니다.<한국 천주교회 사목지침서 90조 1항> 성체를 영하라는 것도 의무가 된다면 심각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성체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우리가 삶을 통하여 끊임없이 도움을 받는 바로 그 분의 몸은 자주 받아 모실수록 좋습니다. 하지만, 그의 남용을 피하기 위하여 미사에 온전하게 참여하였을 경우에 한해서, <하루에 두 번>을 허락하기도 합니다.
264. ⑤ 교회의 유지비를 부담한다. : 1262조
<신자들은 원조요청에 의하여 주교회의에서 제정한 규범에 따라 교회의 유지비를 바쳐야 한다. >
교회는 신자들의 것입니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의 책임은 본당에 있는 사제가 지고 있지만, 교회는 굳이 따진다면 신자들의 것입니다. 이 말은 성당에 있는 것 모두를 맘대로 해도 좋다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정성으로 살펴야 한다는 것이고, 특별한 애정으로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들의 머리에서 그와 같은 생각이 떠났다면 문제는 좀 더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같은 내용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신자 여러분이 미사에 오셨을 때, 헌금과 교무금을 내는 것입니다. 헌금은 매 미사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고, 교무금은 현재 가족과 가구단위로 내게 되어 있습니다. 금액을 정하는 것은 자유이이지만 개신교에서나 구약의 율법시대에서는 이것을 1/10<십일조>로 간주하였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십일조의 정신은 강조하지만, 금액에 대해서 같은 강조점을 띠고 강조하지는 않습니다.
여담으로 신자들이 교무금에 대해서 갖는 태도는 현재, 1/10은 없는 편인 것 같고, 1/20 또는 1/30, 1/40, 1/50 정도까지 다양합니다. 구약의 시대에 이것은 하느님께 내가 얼마나 충실한가를 따지는 척도로 삼긴 했었습니다.
265. ⑥ 혼인성사에 관한 규정을 지킨다. : 1059조
<가톨릭의 신자들의 혼인은 비록 한편 당사자만이 가톨릭 신자라도 하느님 법뿐 아니라 교회법으로도 규제된다. 다만 그 혼인의 국법상 효과에 관하 국가 권력의 관할은 보존된다.>
이 규정은 혼인을 앞둔 사람에게 적용되는 규정입니다.
교회법에는 ‘신자는 신자와 혼인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가톨릭 신자가 많지 않은 지방에서는 교회의 허락에 의하여 관면 혼인<=신자와 비신자간의 허락 혼인>이 있기도 합니다. 이 두 가지 혼인 어느 것도 하느님의 축복과 함께 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반드시 교회법에서 정한 규정을 강조합니다.
부득이한 사정에서 일반 예식장에서 혼인한다고 하더라도, 예식장 혼인 전에 반드시 교회법에 의한 <부부인정>을 하도록 권장합니다.
이러한 규정을 지키지 않았을 때에는 그것을 가리며, ‘조당’이라고 이야기하고, 혼인 당사자에게 성사(聖事)생활을 할 수 없다는 제한 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경우에, 다시 적법한 절차를 거치는 것을 가리켜서 ‘조당해소’라고 합니다. 이 규정의 실천을 위해서는 따로 묻고 상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 모든 사람의 완성
266. 이 부분은 우리의 신자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은 적은 부분입니다. 가톨릭교회에서 이야기할 때, 신앙인으로서의 완성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가르칩니다. 그리고 그 일치는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과 결합할 때, 즉 죽음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에 대해서 자신있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경험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하여
267. 죽음의 문제
인간은 누구나 죽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가리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도 합니다.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지만, 그 역할은 나를 대신해서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왜 죽어야 하는 걸까? 그 누구도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옛날 중국의 진시황도 죽지 않으려고 별 노력을 다했지만 결국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야만 했습니다.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신비 속에 머물러 있는 죽음이라는 실체. 이 신비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올바른 자세는 거부나 반항이 아니라 신앙인으로서 반성의 기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으니 말입니다.
268.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
구약성서에 의하면 죽음은 ‘죄의 결과’(창세기 3,19-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 하느님을 향한 반역 때문에 죽음으로 결말을 맺은 많은 경우를 우리는 성서에서 볼 수 있다.
이사야 25,7-8에 ‘하느님이 머무시는 산에서 잔치를 벌리시고 백성들의 얼굴을 가리웠던 너울을 찢으시며 죽음을 영원히 없애 버리리라’고 약속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또한 호세아 13,14에는 ‘이스라엘을 죽음에서 빼내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고린 15,54-55에 ‘이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을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버렸다.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라는 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은 요한 11,25-26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이는 죽더라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이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죽고 땅에 묻히신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신앙은 가르치고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만일 이렇게 다시 살아난다는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우리가 전하는 예수의 가르침은 헛된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그 분의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고 따르는 신앙에서는 새로운 삶의 본보기로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이 땅에서 실현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고, 결국에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一致)를 이루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269.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
이 세상에는 선과 악이 뒤섞여 범람하고 있습니다. 악(惡)이 선(善)의 이름으로 위장하기도 하고, 선이 악으로 오해받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이러한 모순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 나설 때,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태오 복음서 25장 최후심판의 비유). 하느님의 그 판정에 따라서 우리는 천국과 지옥과 연옥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게된다.
270. 천국과 지옥과 연옥
1)천국 : 하느님이 계시는 곳. 축복 받은 자들을 위해 준비된 곳이며 영원한 생명의 나라(마태 25,31-46참조).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오른쪽의 강도에게 약속하신 곳(루가 23,43참조). 하느님과 함께 사랑으로 일치되어 충만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
2)지옥 : 천국과는 상반되는 곳. 하느님과 분리되고 단절된 상태, 무자비하고 게으르며 저주받은 자들이 가야 할 곳(마태 25,31-46참조). 루가복음서 16장 19-31에 나오는 표현에 따르면, 부자가 고통을 받고 있는 곳이며, 다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된 곳을 가리킨다. 이 곳에 가야 할 판정을 받는 이들은 누구이겠는가? 루가 복음서 이 부분에서는 사랑의 실천을 하지 않은 대상을 지칭하고 있다.
3)연옥 : 성서에는 나와 있지 않은 개념. 사람의 아들을 모독한 이는 용서받을 수는 있다(마태 12,32)는 말을 하심. 교회는 초기부터 기도와 미사로써 연옥에 있는 영혼이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가르쳤으며,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과 서로 통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기도한다.(사도행전의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으며’와 ‘우리가 훌륭했지만 이미 죽은 이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도 같은 이치)
271.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이다. 이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고통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산다. 실제로 죽음은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하느님 앞에 설 때 완전하게 자신 있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안에서 결실을 얻을 때까지 충실하게 살아야 할 것이다.
272. 세상의 완성(=종말)
예수님은 여러 번 세상의 완성과 그 날의 분위기에 대해서 복음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 사실의 묘사라고 하기보다는 신앙의 위기와 시대적인 위기를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세상의 완성(사도행전 1,7=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지금인가?)에 대해서 묻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결정하셨으니 알 바가 아니라는 말씀을 하심으로써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다. 분명히 우리가 눈으로 보는 세상은 변해가고 달라지겠고 사라져 버리겠지만(1고린 7,31) 착한 행위와 그 업적은 영원히 남는다.
273. 그리스도의 재림
예수 그리스도는 구세사(救世史)의 목표이며 출발점이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완성에 대한 많은 가르침들의 목적은 ‘선과 악이 혼돈되어 있는 현재의 역사가 끝나고, 眞, 善, 美 자체이신 하느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승리할 것이며, 구원의 역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이의 구세주이시며 주님이심이 만방에 밝혀질 거라는 가르침’이다.
274. 육체의 부활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다시 살 것이라고 가르쳐왔다(요한 11,25).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교회는 세상이 완성되는 날에 모든 인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앞에 서게 될 것임을 믿고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듯이 우리도 선인이든 악인이든 부활 할 것이다(1고린 15,13-14). 예수님은 육신을 지니고 부활 승천하셨지만 생명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가셨다. 육체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교회의 가르침의 의도는 ‘인간이 단순히 영혼만의 존재가 아니며,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로서 그 육체는 소중한 것이며 영원히 하느님과 함께 살도록 부르심 받았다’는 점에서 전인간이 변형이라는 것을 가르친다.
275. 공심판(公審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고 모든 이들이 부활할 때에 사람각자는 있는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의 나라가 해와 같이 빛날 것이며(마태13,43), 밀과 가라지가 분리되고,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구별된다. 즉 공심판은 모든 것이 완성되고 마무리짓는 것을 말한다. 이때의 심판기준은 마태 25장처럼, 이웃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사랑했는가?’이다.
공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희망을 주는 것이며, 그때를 올바로 맞고 현세 생활을 윤택하게 해 나가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활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와 양심에 대하여
276. 객관적인 윤리규범인 자연 도덕률(자연법)
인간은 선한 것을 식별하고 그것을 바라고 살아간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인간다운 행위를 함으로써 자아를 성취하고 책임을 진다. 인간은 자기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에게서만 자신이 누구이며 어떻게 처신해야하고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안다. 또한 우주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설정한 질서(신법)에 의해 지배된다. 인간은 이러한 하느님의 진리를 알아듣고 책임을 지고 지켜나가게 되어있다. 이것이 이성의 규범이다.
277. 양심 -- 주관적 규범
인간은 윤리행위를 위한 객관적인 규범(법)외에 이것에 호응하는 내부의 기능이 있어서 구체적인 윤리행위를 하도록 이끈다. 이것이 양심이다. 이는 행위의 주체자에게만 소속되는 것으로 주관적 규범이라 한다. 양심은 인간의 가장 내밀한 안방이요, 하느님이 계시는 지성소이며 그분의 법의 소리가 들려오는 곳이다.
이 법의 소리는 인간에게 언제나 선을 사랑하고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한다. 인간은 양심에 순종해야 하며, 양심(良心)과 인정법(人定法)이 충돌될 때에는 양심을 먼저 따라야한다고 가르친다.
278. 죄란 무엇인가?
인간은 자아를 성취하는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기 실존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거부하며 저항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아담이 행한 의도적인 어김이며(외적인 행동), 하느님과 같아지고자 하느님과 경쟁하고자 하는 태도로 생각한 것이다.(내적인 행동) 결국 하느님을 거부하였고 자신을 선과 악의 판단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죄란 하느님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 분의 계명과 질서와 조화를 깨뜨리며 그 분의 초대를 거절하고 그 분과 대등해지려고 하며 그 분께 용납될 수 없는 주장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이 아닌 피조물에 자신을 내 맡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내적인 자세와 외적인 행동이 다 문제되는 것이다.
죄는 하느님의 계명을 거스르는 행위를 그릇된 줄 알면서도 자유로이 의도적으로 행하는 경우에 성립한다. 대죄와 소죄로 나누기는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죄(死罪)와 용서받을 수 있는 죄로 구별한다.
279.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느님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분관계를 잃었고 낙원에서 추방되었으며 인간사이의 갈등도 생겼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도 보내주셨다. 죄인을 구원하러 그리스도는 오셨으며(마태 9,13), 죄가 없으신 분(요한 8,46)으로서 죄를 없애고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당신 자신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셨다.
280. 인간의 응답
인간이 이 하느님의 사랑을 수용할 때에 비로소 구원이 될 수 있다. 죄가 자유의지의 소산이듯이 하느님의 사랑 역시 인간의 자유의지로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는 표시로서, 인간은 회개하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려야 하며,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행해야 한다. 주님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구원이다. 이 초대에 응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바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생활이다.
281. 믿음의 생활
믿음이란 하느님의 초대에 인간이 몸과 마음을 다하여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대상은 하느님과 그 분의 구원계획이다. 이 믿음은 감상적인 것이 아니다. 확실히 내용을 알고 맡기고 동의하는 것이며 자신을 의탁하는 사랑의 행위이다.
세례를 받을 때 주어지는 믿음은 내가 어떻게 키워 가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진다. 믿음의 대상과 내용을 더 잘 알도록 성서를 읽고 기도하며 성사생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믿음에 따라 우리의 행위가 달라져야만 참되게 살아있는 믿음이 된다.
282. 희망의 생활
희망은 우리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바라고 기다리는 것이며, 이는 믿음에서 나온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이 희망은 때때로 실패로 끝나는 인간의 희망과는 다른 것이다.
하느님께 바라는 이 희망은 미래에 올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하느님 나라의 상속, 영원한 생명, 현세에서 기쁨과 행복이라는 구체적인 것이며, 결국에는 세상 종말에 이루어질 모든 사람들의 완성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가 인간의 일에서 쉽게 실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느님께 희망을 두지 않고 인간의 현실에만 집착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느님께 대한 희망의 포기는 커다란 잘못이며 이는 믿음으로 극복되어야 한다. 희망의 비결은 믿음이다.
283. 사랑의 생활
인간이 할 수 있는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쉽게 잊어버릴 수 있지만, 그 분은 목숨을 바쳐가면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신다. 이에 인간인 우리가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 사랑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우리에게 알려주신 하느님께 우리가 할 수 있는 응답은 역시 사랑의 실천이다.
하느님은 한때 우리를 사랑하시고 정지하신 분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안에 살아계시며 사랑을 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284. 믿음, 희망, 사랑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윈리이다.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하느님의 구원약속에 굳은 희망을 갖게되며 마침내 그 분을 사랑하고 따르게 된다. 믿음을 뿌리로 하고 희망을 줄기와 가지로 한 나무가 되어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이 사랑은 실제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사랑으로 구성된다.
의로운 사회 건설을 위하여
285. 그리스도인의 사명
인간공동체는 공동선을 실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삶을 본받아 이 세상에서 이웃을 사랑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기완성, 세상의 완성, 하느님나라의 실현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과 누룩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그것이 되기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을때, 복음정신에 따라 싸워야 한다.
286. 국가와 교회
국가와 교회는 공히 국민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한다는 면에서는 일치한다. 그러므로 각기 고유한 범위의 이익을 추구하면서도 상대방의 이익과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는 하느님의 역사와 구원의 보편성을 대행하므로 국가나 정부의 차원을 초월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가 복음적인 가치를 위협하는 일이 있을 때 예언자다운 목소리로 그의 잘못을 지적해야 한다. 국가는 교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선교활동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며 권력은 공동체에 봉사하라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287. 정치와 그리스도인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더 완전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 공동선을 실현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그렇게 형성된 정치 공동체는 일정한 권력과 그 권력을 대행하는 집권자를 필요로 한다. 이 정치 공동체는 인간의 본성에 바탕을 둔 것이므로 하느님이 정하신 질서에 속한다. 모든 사람들은 합법적으로 선출된 집권자와 선택한 체제와 자연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限), 공법에 복종할 양심의 의무를 지닌다. 따라서 부당한 권력이나 법에는 복종할 의무가 없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이다.
288. 경제와 그리스도인
인간은 노동을 통하여 다른 형제들과 결합하고 봉사하며 창조사업에 협조한다(창세 1,28). 그러므로 누구나 각자에게 가능한 책임의 정도에 따라 경제활동을 전개할 수 있고 그 대가로 얻은 것을 소유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라 해서 사유물로만 여기지 말고 공유물로 여기며 남에게도 유익하게 사용해야 한다. 정당하게 해결되지 않을 때 교회는 이런 문제에 복음의 빛을 던져주어야 하지만 모든 이가 듣는 것은 아니다.
289. 교육과 그리스도인
인간에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참된 교육은 인간이 지향하는 대로 공공복지를 위한 인격형성을 추구한다.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은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 외에도 원만한 인격과 봉사정신을 배우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며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도록 배우고 교육에 종사하는 이들은 배워야 한다.
290. 대중매체와 그리스도인
사람들에게 더 없이 커다란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 대중매체이다. 여기에 종사하는 이들은 올바른 양심으로 해야한다. 또한 보도는 진실하게 해야하고 정의와 사랑을 지키는 한도에서 완전한 것이어야 한다. 물론 전하는 방법에도 윤리적이고 합당해야 한다.
291. 국제관계와 그리스도인
국제관계가 밀접해짐에 따라서 현대는 공동선을 위해 세계적인 공권력에 의한 국가간의 질서를 요구하게 되었다. 국제관계는 상호보완적인 측면에서 유지 발전되어야 하기에 좀 더 나은 나라는 절대적인 빈곤에 허덕이는 나라들을 돕는 데 앞장서야 하고 군비축소와 전쟁억제를 위해 애써야 한다.
1) 성모 영보 축일 :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여 날 것을 천사를 통하여 기별받은 날
2) 십계명에 대한 내용은 예수회 소속 송봉모 신부의 강연 테잎 ‘십계명으로 사는 인간’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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