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평신도들의 자발적 신앙 활동
한국에 천주교회가 전래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 성장의 가장 큰 원동력은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신앙 활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를 다음의 세 가지 예(例)로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첫째, 평신도들의 자발적 신앙 열심은 가성직 제도의 실수에서 나타납니다.
천주교의 성직 제도에 대해서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이벽을 위시한
초기 신자들은 1786년부터 북경 교회를 본떠서 스스로 성직 제도를 창설하여 운영하였습니다.
누구는 주교로, 누구는 사제로 임명하여 2년 동안 주일 미사를 거행하고
세례. 견진. 고해 성사 등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공인하는 성품성사(聖品聖事)를 받지 않은 평신도는
결코 주교직과 사제직을 맡을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몰랐던 것입니다.
이를 역사가들은 훗날 잘못 알고 시행했던 성직 제도라고 해서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이들은 다른 서적을 읽다가 이에 대한 타당성에 의문을 갖게 되어
북경 주교에게 문의한 결과 이의 부당성을 지적받고 금지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물론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였던 이들은 그동안의 모든 성사 집행을 중단하고
성직자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런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통해서 역으로 우리는
당시 평신도들의 신앙 열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엿보게 됩니다.
실수는 컸으되 그들의 신앙심만은 가상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평신도의 자발적 신앙심은 교우촌 생활에서 나타납니다.
평신도들은 천주교에 대한 박해로 신앙 생활이 어려워지자
깊은 산속으로 숨어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동안 그들이 살아왔던 삶의 보금자리를 떠나 생판 낯선 땅에서
자발적으로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던 것입니다.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1791년 신해박해 이후로 추정됩니다.
교우촌은 먼저 천주교가 일찍 전파된 충청도 서부, 전라도 북부, 경기도
남부의 산간 지역에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이후 신유박해(1801)를 계기로 더욱 확대됩니다.
교우촌을 중심으로 한 소공동체 형태의 신앙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을 만큼 중요한 것이
평신도들의 활약이었습니다.
특히 교우촌 회장들의 노력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교회의 저변 확대에 귀한 밑거름이 되어서
천주교 신앙이 대대로 이어져 나갈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신앙이 좋아서 선택했던 교우촌 생활,
이것은 오늘날 편한 시대에 우리 신앙인들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모범입니다.
셋째, 평신도 활동의 자발성은 여성 신자들의 활동에서도 나타납니다.
여성 신자들의 활동은 한국 교회가 내세울 수 있는 자랑거리입니다.
집안의 어린 자녀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일은 언제나 그들 몫이었고,
박해로 가장이 순교한 경우 집안의 생활을 꾸려 나간 것도 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순교 신심과 교리 교육은 한국 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들의 역할이 있었기에 신앙의 대물림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의 전통이 되어 오늘까지도 여성 신자들이
교회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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